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556 심 봤다! <서산 백화산 284m>

김흥만 2020. 5. 30. 11:19

2020. 5. 19.

숲속 풀숲에 '백선'이 피었다.

 

심 봤다!

나는 자연삼(自然蔘) 중 봉삼(鳳蔘) 또는 봉황삼(鳳凰蔘)으로 불리는 '백선'을

작년에 이어 또 만난 거다.

 

 

산에서 이렇게 귀한 꽃을 만나는 건 신나는 일이다.

사삼(沙蔘)으로 불리는 '더덕', 태자 삼(太子蔘)으로 불리는 '개별꽃'에 이어,

간약(肝藥)으로 쓰이는 '고삼'을 만났고, 이번에 봉삼(鳳蔘)으로 불리는 백선까지

만났으니 운이 좋다.

 

민간에선 보약으로 쓰이는 고삼, 단삼, 현삼, 인삼, 사삼을 오삼(五蔘)이라 한다.

인삼은 비장에 좋아 '황삼',

사삼(더덕)은 폐에 좋아 '백삼',

현삼은 콩팥에 좋아 '흑삼',

고삼은 간에 좋아 '자삼',

단삼은 심장에 좋아 '적삼'으로 불리는데 이와 다른 봉삼을 만난 거다.

 

몇 커트를 찍고 정상에 다녀오는 사이 누군가 백선을 뽑아버려 본의 아니게

백선의 뿌리를 보게 된다.

꽃을 훼손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백선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다.

 

시들어가는 백선 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다 눈길을 돌리니 작은 여울에

'개양귀비'가 곱게 피어 요염한 미소를 보낸다.

 

2020. 5. 20. 11;30

서산 백화산을 찾는다.

코로나 19로 빼앗긴 일상을 찾으려 도착한 백화산 입구에 있는 '호국 무공수훈자

기념탑'을 바라보며 잠시 호국의 시간을 갖는다.

 

소문과 같이 백화산은 입구부터 잘 정리되어 많은 기대를 하게 한다.

 

산행은 청소년수련원에서 시작해 정상을 거쳐 대림아파트 방향으로 원점회귀하는

산수길 1구간으로 결정하고 5.4km의 산행을 시작한다.

 

태안 8경 중 1경에 속하는 백화산,

산은 높지 않으나 암릉구간이 멋지다고 소문난 백화산을 오르며 오늘은

침정(沈靜)에 잠겨야겠다.

 

산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산,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

돌길이라 발자국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에서 입 다물고 침묵할 필요는 없겠다.

조금만 올랐는데도 산의 자태가 한가롭고 돌산이라도 단정하니 어쩌면 오늘

참된 고요함을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나는 우연을 잘 안 믿는 편이다.

살면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간밤에 꾼 꿈에서 본 바위와 똑같은 '불꽃바위'가 내 시야를 압도한다.

 

불꽃바위에 다가서기만 했는데도 바위에서 펄펄 끓는 지기(地氣)가 나오는 걸

느끼기에 이곳에서 도(道)를 닦으면 독존(獨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안읍내에서 바라보면 바위의 기괴한 모양의 무늬, 위로 불꽃같은 형상이

솟구쳐 '불꽃바위'로 불리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 같기도

하여 '부부바위'라고도 불리는 바위 앞에 선다.

 

'용허리바위'를 지난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고래바위'라고 부르며 고래 등에 올라서 놀았다는데,

또 다른 설명으론 남쪽의 청룡바위에서 길게 산등성이를 타고 이어진 용의

허리와 같다고 안내판에서 설명을 한다.

 

암릉길을 오르며 문득 홍혜걸 박사의 글이 생각난다.

 

골산(骨山 바위산)은 정기(精氣)을 얻으려 입산(入山)을 하고,

육산(肉山 흙으로 덮인 산림)은 정기(精氣)를 맞기 위해 등산(登山)을 하는 거라며

통즉등산(通卽登山)이요, 궁즉입산(窮卽入山)이라는 거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등산이 땀 흘리고 운동하는 산길이라면, 입산(入山)은 궁지에 몰렸을 때

해답을 모색하고 구원을 강구하는 길이라, 즉 입산수도(入山修道)를 말하는 건데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골산을 오르며 등산을 하는 걸까,

아님 입산을 하는 걸까.

 

인생에 있어서 좌절과 실패, 성공과 곤궁한 처지의 구간에 서있는 거도 아니기에

입산이든 등산이든 구분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오늘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찌들었던 공해를 배낭에 잔뜩 담아 힘든 골산을

오르내리며 땀으로 씻고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거다.

 

12;24

멍석 바위와 굼벵이 바위를 지나며 묘한 생각이 든다.

이 정도 산이라면 온갖 산새가 지저귀어야 하는데 그 흔한 동박새나 까마귀는커녕

꿩도 꿩꿩 대지 않는다.

 

바다가 가까워서일까.

어쩌면 사나운 바다 갈매기가 새들을 내륙으로 다 쫓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보이지 않고 판상절리(板狀節理) 형태의 화강암 덩어리를

오르며 규모로는 어림없지만 인왕산의 치마바위, 삼각산, 도봉산의 판상절리와

비교를 해본다.

 

판상절리는 암석에 동심원(同心圓) 모양으로 평행하게 생긴 균열을 말한다.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에서 재난 경고음이 수차례 울린다.

지금도 당국에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라고 한다.

그러나 산속에선 약간의 거리만 두면 된다.

 

요즘엔 나도 모르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물을 물끄러미 보는 습관이 생겼다

간절하고 처연하고 애틋한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이나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많다.

 

 

세자바위에 오른다.

불꽃바위, 세자바위, 용상바위, 굼벵이바위 등 온갖 토어(tor)가 많은 백화산,

 

애추(崖錐)는 보이지 않고 기묘한 형상의 바위를 보며 문득 대구 비슬산(琵瑟山)

대견사지터의 tor가 생각난다.

 

용상바위에는 앉지 못하고 곁눈질을 하며 지나간다.

 

악어바위가 나온다.

그동안 서산, 태안, 서천지역의 많은 산에 올랐다.

 

서대산엔 아직 오르지 못했지만 팔봉산, 용봉산, 봉수산, 덕숭산,오서산, 황금산,

영인산, 성주산, 가야산, 만수산, 희리산을 올랐으니 꽤 많이 오른 셈이다.

그중에서 용봉산과 팔봉산의 tor가 많이 생각난다.

 

 

12;50

성벽 아래 핀 엉겅퀴에 앉은 꿀벌이 꿀을 빨고 있다.

요즘 공해 탓인지 꿀벌이 많이 사라졌다며 전 세계가 꿀벌 비상이 걸렸다.

 

퇴촌에서 토마토 농사를 짓는 지인은 외래종 벌을 수입하여 수분(授粉)을 한다고

하는데 꽃과 꽃을 이어주는 매개곤충인 벌의 날갯짓을 바라본다.

벌떼 한 무리는 4만~6만 마리의 꿀벌로 이루어지는데 이 벌떼 한 무리가 하루에만

약 3억 송이의 수분을 도와준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최근 미국과 유럽의 꿀벌 개체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는데,

꿀벌이 사라지면 과일 생산량은 22.9%, 채소는 16.3%, 견과류는 22.9% 정도가

감소할 것으로 분석된 자료가 나와 눈길을 끈다.

 

꿀벌을 뒤로하고 포곡식으로 쌓아 올린 백화산성의 고즈넉한 풍경길을 걷는다.

산의 정상부만을 둘렀으면 '테뫼식'으로 볼 수 있는데, 길이가 700m나 되었다니

나는 그냥 포곡식으로 부르겠다.

 

기록에 의하면 현재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1,200여 개 이상의 산성터가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산성을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로

보존하여왔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려는 나라는 미리 성벽을 쌓는다.

따라서 '전쟁 의식'의 소산에 의해 민초들의 피땀으로 축조된 성벽(城壁)옆을

걸으며 그들의 거친 숨소리를 듣는다.

 

조선 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백화산 정상에 축조된 백화산성은 둘레 약 700m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100여m만 남았다.

 

성벽은 견고하게 쌓았는데 성벽 앞에 펄펄 끓는 물이 흐르는 해자(垓子)의

흔적이 없으니 해자를 만들지 않았나 보다.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보이지 않지만 사방이 화강암 절벽이고 높아서 기어오르기

힘든 성벽아래 깊어서 건너기 힘든 해자까지 갖췄더라면 고성심지(高城深池)라

할 텐데 나 같은 문외한(門外漢)이 보기엔 그냥 평범한 산성(山城)일 뿐이다.

 

구리와 쇠로 만든 금성철벽(金城鐵壁)은 아니라도 일단 성안에 들어오니 사방이

조망되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라 안도(安堵)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성벽의 높이는 2~3m 내외이고 소태(蘇泰)라는 마을과 우물이 있었다는데

우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쌍괴대(雙槐臺)'라는 거대한 바위가 나를 압도한다.

 

거대한 바위에 유려한 필체 음각(陰刻)으로

'군수 이기석 수식 임인중춘(郡守 李基奭 手植 壬寅仲春)'이라 새겼다.

 

대략 1902년 즉 임인년 봄에 군수 이기석이 이곳에 느티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는

뜻인데 근처에 100년 넘은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12;50

거대한 암괴덩어리와 수백 평이 넘을 정도로 넓은 별유천지(別有天地)인

백화산 정상(284m)에 올랐다.

 

정상에선 태안시내가 다 보인다.

서해바다가 보이고 360도 조망되는 곳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백화산은 봉수대(烽燧臺) 역할을 한 산인데,

봉수대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조선시대의 군사 통신시설을

말한다.

 

평화 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선이 해안에 접근하면 3개, 적선이 해안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군이 육지에 상륙하면 5개의 횃불을 올린다.

 

안개, 구름, 비, 바람 등 기상악화로 봉수의 전달이 불가능하면 포성이나 뿔나팔,

징 등으로 알리고 그래도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軍)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서있는 백화산 봉수대는 조선 중기 16세기 초 신설된 봉수로

동쪽의 서산, 북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남쪽의 도비산 봉수대로 보내는

할을 했다.

 

이곳에서 보내는 봉수는 서해안을 따라 안산, 강화, 인천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에

최종 전달되어 중앙정부에 적의 침입을 알렸다.

 

사방이 조망되는 백화산 봉수대는 빈번하게 발생한 왜구의 약탈에 대응하는

봉수대로써 백화산성과 함께 서해안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안내판을 읽는다.

 

정상에서 막걸리 한잔은 꿀맛이다.

막걸리와 맥주잔으로 건배를 하며 지나간 삶을 잠시 반추(反芻)한다.

 

순식간에 흘러간 세월,

젊음은 어느 곳에서 녹아버렸는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잔주름만 남았다.

지나간 추억이 그리움이 되고,

어느 사이에 종심(從心)을 바라보는 황혼이 되었구나.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며 남은 생애 잘살아보자고 다짐을 한다.

 

5월의 산은 하루하루가 달라지게 변한다.

연둣빛이 사라지고 녹색으로 변하는 숲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는

무슨 나무인지 멀어서 모르겠다.

 

산 아래에는 이팝나무와 예수를 매달기 위해 십자가를 만들었던 산딸나무에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산 위엔 밤나무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바람을 안고 등지며 산마루를 지키는 소나무가 짙은 솔 향을 뿜는다.

 

오른지 10년이 다되어가는 '팔봉산'이 보여 줌으로 당긴다.

같이 올랐던 친구 중 일부는 유명(幽冥)을 달리했고, 다른 친구들은 아홉수에

걸렸어도 특별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친구들의 환한 얼굴을 보며 부처님의 연기법(緣起法)을 떠올린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따라서 너 또한 내가 아니겠는가."라고 했으니 참 오묘한 진리로다.

 

거대한 바위 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물 흐르는 계곡을 보지 못했는데 수맥이 지하로 연결된 걸까.

 

옛날 두타산에서 지하로 흐르는 물소리를 호랑이 울음소리로 착각을 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는데,

 

"밖이 아무리 밝아도 내가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법,

따라서 내 등(燈)을 먼저 밝혀야 진리도 보이는 법이다."

물소리 들려주는 바위를 관조(觀照)하며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법어를 음미한다.

 

바위투성이로 된 전형적인 골산(骨山)을 밟으며 올랐건만

하산 길엔 돌멩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흙으로 덮인 육산(肉山)이니 부드러운

흙길은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신나게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올랐다가 흙길을 밟으며 내려오니 백화산의

영기(靈氣)를 받으라는깊은 뜻인 모양이다.

 

산모퉁이에 '의아리'가 피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은데, 내 몸의 컨디션이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늙어가는 걸까.

제행무상의 자연, 춘하추동의 순환, 나에게도 찾아오는 생로병사의 변화를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라 기력이 점점 달려도 순응하면서 받아들여야겠지.

좋은 말로 표현하면

나이가 들어가는 거를 익어간다고 표현하는데 결국 인간의 욕심이 아니겠는가.

 

여름의 문턱에 핀 으아리와 땅비싸리 꽃을 보며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떠올린다.

흰 꽃인 '으아리'가 고결함과 정화된 느낌을 주는데 반해 분홍색 '땅비싸리'는

안정감을 준다.

 

14;10

도(道)는 자연을 따르는 법이라,

자연스럽게 자라는 풀과 꽃은 나무와 더불어 산을 지킨다.

 

종주한 백화산 하늘이 사라졌다.

내 인생이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산도 마찬가지리라.

산을 바라보며 하늘과 도(道)와 일체 세계의 현상이 바로 나(我)로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15;14

코로나 바이러스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항구 하늘에 엷은 구름이 몰려오고,

하릴없이 흔들리는 텅 빈 배가 외롭다.

 

일상을 빼앗겼어도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다보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언젠가는 내 두려운 삶속에도 소소한 기쁨이 찾아오겠지.

 

갈매기 사라진 텅 빈 항구,

선장과 선원이 없는 텅 빈 배,

설렘이 가득 찬 관광객 없는 선창가,

 

수산물을 조금이라도 팔기위해 가게 문을 연 상인들은 제풀에 지치고,

해풍마저 사라진 바닷가 하늘에 뭉게구름만 흐른다.

 

2020. 5. 20.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