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557 보원사 옛터에서 개심사까지

김흥만 2020. 5. 31. 10:21

2020. 5. 21.

여행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보원사지터를 여러 번 지나치면서 들리지 못함에 늘 무엇인가 아쉬웠지.

외국여행이나 국내여행을 하다보면 빤한 일정에 아쉬움이야 항상 남지만

이번만은 보원사지터에 들린다.

 

여행의 삼대요소는 값이 비싸지 않고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해야 한다.

그립고 아쉬웠던 장소에 들리 게 되면 그 여행은 궁극(窮極)에 도달하기에

상위 등급이 되는 거다.

 

당간지주앞에 서자 영적(靈的)인 에너지가 몸에 와 닿는다.

삶에서 영(靈)이 빠지면 괜히 우울하고 몸도 개운하지 않다.

 

잡귀신을 물리치는 당간지주는 잡다한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게 하고

숙취를 한방에 날려준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 앞에 설치했던 건축물로서

주변지역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는데,

설법이나 법회 중임을 표시하기 위해 사찰 앞에 세운 깃대를 말한다.

 

여기 서있는 보원사당간지주는 보물 제103호, 부석사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었으니 이 당간지주가 부석사보다 보물로 먼저 지정된 셈이다.

 

9m 높이의 5층 석탑이 하늘을 찌르고 일자리를 위한 일자리인지

많은 주민들이 모여 풀 뽑기를 한다.

 

보물 제 104호인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은 일반형 석탑으로

통일신라말이나 고려 초기에 조성한 석탑으로 추정된다.

 

석탑을 향해 다가간다.

석탑의 강력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온화하면서 장중한 느낌을 준다.

 

개심사를 품은 상왕산과 보원사지터에서 발사되는 자기장(磁氣場)이 중심에 있는

석탑에 몰려와 눈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삶이란 길을 걷는다.

삶이라는 인생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삶이라는 발걸음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무심코 지나쳐 버린 인연은

헤아릴 수 없겠지.

 

은퇴 후 산(山)과 여행을 즐기며 꽃 한 송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 속에 숨겨있던 아름다움과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으려 했지만

실제론 주마간산(走馬看山)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을 지나가면서 허겁지겁 내가 정해놓은 길을 향해 가느라 소중한 문화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지나감에 후회가 밀려온다.

 

지난 10여 년간 자연 속을 걸었지.

시간이 날 때마다 어눌한 솜씨로 사진을 찍어댔는데 오늘은 석탑을 찍으며

묘한 생각이 든다.

 

상왕산에서 내려오는 청량한 기운, 하늘을 맴돌며 까악대는 까마귀가 소중한

인연이 되고 석탑에서 나오는 웅혼한 기운이 머릿속에 쌓인 번뇌를 녹여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잠시 스쳐지나가는 나그네의 존재지만 오늘따라 삶이 보이니 해탈(解脫)의

문 앞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를 만난다.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신 보승탑 옆에 선 탑비의 거북이가 신기하다.

 

몸은 거북이요,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눈은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콧수염은 뒤로 돌았다.

 

비 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희'는 용이 낳은 아홉 아들 중 첫째인데 거북처럼 생겼고 무거운 짐을 잘 지키기에

대부분의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 바로 이 비희다.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조선 중기 이전에 폐찰 되었다는 보원사지터를

걸으며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노래가 생각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달밤에 머무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만 달 없는 칠흑 같은 밤이면

은하수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산길을 1.6km만 오르면 개심사가 나온다는데 승용차로 이동하기로 한다.

 

09;53

개심사(開心寺) 입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린다.

정념(正念)을 가지면 마음이 절로 바르고 행실이 알차다고 했다.

 

돌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열고 몸을 정리한다.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하니 눈도 맑아진다.

 

이수광 선생은

"눈은 마음의 깃발이다. 보는 곳이 높으면 마음도 따라서 올라가고,

보는 것이 낮으면 마음도 덩달아 내려온다."고 했다.

 

개심사에 오르며 목용단(目容端)이 떠오른다.

'보는 것이 단정하면 마음은 절로 바르게 된다.' 즉 눈높이가 마음의 높이를

결정한다는 뜻이니 끊임없이 나 스스로 자기 성찰을 해야겠지.

 

10;12

15분 정도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범종각을 만난다.

범종각의 기둥은 나무가 이리저리 휘인 상태 그대로 써서 자연미를 극대화 시킨

명품이다.

 

종(鐘)을 매단 용뉴에 용은 한 마리다.

종을 두드리는 공이(撞木)에 특별한 모양과 고래문양은 보이지 않는다.

 

포뢰는 용이 낳은 아홉 아들 중 셋째에 해당하는데 소리가 크고 맑다.

평소에 고래를 무서워해서, 고래가 포뢰를 치면 큰소리로 울기에

종소리를 크게 하려면 종에다 포뢰를 만들어 놓고 이를 치는 공이는 고래로 만든다.

 

종에 아로새긴 무늬를 화(華)라고 하니까, 화경(華鯨)에서 화는 종이요,

경(鯨)은 공이를 뜻하는 거다.

 

종 위에 종을 매다는 포뢰를 달았는데 용뉴라 한다.

 

고래 모양의 공이가 뭉툭한 주둥이로 종을 향해 달려들면 포뢰용이 저를 잡아

먹으려는 줄 알고 비명을 질러댄다.

그 비명이 맑고 웅장한 종소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는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범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용뉴는 우리나라에서 3마리였다가 한 마리로 줄었고, 일본은 세 마리요,

중국은 아홉 마리로 알려졌다.

 

오늘 내 눈은 호강한다.

옛 건물 지붕형태 중 개심사에서 팔작지붕과 맛배지붕을 만난다.

 

중간정도가 직경이 크고 위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만든 '배흘림기둥'을

보게 되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 생각난다.

 

이밖에도 기둥 상부직경보다 하부직경을 크게 한 '민흘림기둥'이 있으며,

보통 집은 상하직경이 같은 흘림이 없는 기둥을 쓴다.

 

 

색바랜 단청의 대웅전에서 청아한 독경소리가 흘러나온다.

도반의 길을 걷는 불자가 아닌데도 경건한 마음이 생기니 나도 모르게 스스로

합장을 하고 목용단(目容端)을 생각한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심검당, 무량수각, 안양루, 팔상전이

있는 개심사에서 다포계, 주심포계, 익공계 등의 형식을 골고루 갖춘 개심사

앞마당에는 오층석탑과 청동화로가 보인다.

 

개심사는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혜감'이 창건한 사찰로 건립시기가 서기 654년이니

무려 1400년에 가까운 천년고찰이다.

 

10;38

찾아오는 관광객이 별로 없기에 마스크를 쓴 수문장이 반갑게 맞아주고,

해미읍성의 주막에 들어가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여행을 끝낸다.

 

사람 없는 해미읍성과 성내의 넓은 거리엔 한가로움이 있다.

소란함이 없으니 나 또한 한가로움을 잃지 않는다.

한가로움은 보원사지터와 개심사를 한가롭게 다녀온 연유(緣由)인지도 모르겠다.

 

2020. 5. 2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