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8.
50년 전 그날 이 시간에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잠시 눈을 감은채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
1970년 7월 7일 428km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국가예산의 23.6%에 해당하는 430억 원의 비용을 들여 2년 5개월 만에 개통이
된 거다.
부산행 고속버스로는 삼화고속, 한진고속, 중앙고속, 한일고속, 동양고속버스가
있었는데 나는 고속도로 개통 다음날인 7월 8일 부산행 고속버스인 '그레이
하운드'를 탄 거만 기억이 난다.
당시 동산유지와 쌍벽을 이루던 비누회사로 말표 세탁비누와 밍크비누를 생산하던
천광유지에 입사해 근무 중 제일은행 덕수지점과 거래하던 당좌거래가 최종 부도
처리되자 채권단이 점령군으로 들어왔고,
나는 뜻하지 않게 부산 거제리에 있는 본사 기획실로 전보발령(轉補拔令)이 난 거다.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당일에 승객을 태운 고속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았고,
7월 8일부터 운행을 했기에 운행첫날 부산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당시 최신 교통수단으로는 '관광열차'가 특급으로 부산까지 4시간 반 정도 걸려
고속버스보다 한 시간 정도 빨랐는데 요금은 2,700원이었다.
관광열차는 물론 쾌적한 분위기였지만 고속버스 1,600원보다 무려 900원이 비싸니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이동하는 게 부담이 적었다.
1970년도까지 서울과 경주 수학여행을 제외하곤 방학 때 고향인 진천에 다녀오는 게
여행의 전부였던 나는 고속버스에 오르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팔등신 미모를 뽐내는 안내양이 돌아다니며 사탕 봉지를 나눠주고,
버스 뒤쪽에 화장실까지 있으니 시골 출신인 나에겐 모든 게 생소한 풍경이다.
부산터미널까지 약 5시간 반 정도 걸린 거로 기억이 나는데,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뺏겼다.
헐벗었던 산(山)에 산림녹화사업이 시작되어 군데군데 나무가 보이기 시작하고,
들판에 모내기는 진즉 끝났다.
어느 휴게소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추풍령휴게소였던가 화장실에 들어가려니 10원을 내라고 해,
화장실 뒤편으로 가 노상방뇨(路上放尿)를 하기도 했다.
은행에 들어간 친구들 월급이 본봉 10,400원 직책수당 2,000원 등 각종
수당까지 합치면 25,000원 정도였다.
내 봉급은 서울사무소에 근무할 때 22,000원 정도였는데 부도가 나자 약 3천원
정도 감봉이 되었고, Petri 카메라 할부금과 거제리 하숙비 약 7,000원 정도를
내려면 절약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부산터미널에 마중을 나왔던 동료직원의 소개로 하숙집을 정하고,
기획실에 출근을 하니 기획부장이 서류를 주며 무조건 암기를 하라고 한다.
내용은 밍크비누와 말표 세탁비누, 밍크 치약의 성분에 대한 제원(諸元)이다.
소기름인 우지(牛脂)가 78% 이상, 이산화 타이타늄으로 불리는 Tio2, 형광제,
계면활성제 등 원료 배합비율을 하루 만에 외운다.
논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을 하숙집에서 너무 먹어 진저리가 나고,
시간이 되면 방파제에 나가 붕장어(아나고)회와 35도짜리 삼학소주로 술잔을
기울이고,
어쩌다 고향친구를 만나면 당감동 화장터 뒤에 올라가 친구의 트럼펫 연주를
듣기도 하던 부산 생활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천광유지에서 사직을 한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 해병대에 두 번씩이나 자원을 하지만 보기 좋게 낙방을 한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50주년이라는 뉴스를 보며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인
50년 전 과거로 돌아갔다가 현실로 돌아온다.
눈을 뜨고 내 나이를 생각하니 어느새 나도 저물었구나.
2020. 7. 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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