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4. 05;30
밤새도록 태풍급 강풍이 울어댔다.
70% 비올 확률 예보를 무시한 하늘에선 먹구름끼리 요란스럽게 싸움을
한다.
매미소리도 들리지 않고, 열대야도 미세먼지도 사라진 산길은 처참하다.
영글지 않은 밤송이와 도토리가 사방에 떨어졌고,
부러진 나무 가지들이 산길을 가로막아 허리를 굽혀 잔가지를 치운다.
숲 속에 급히 생긴 웅덩이에서 맹꽁이와 개구리가 박자를 맞추며 울어대고,
풀숲에 숨었던 어린 고양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쩌지,
주머니엔 비상용 초콜릿밖에 없는데, 고양이에게 줄 먹이가 없으니 난감하다.
어미 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고양이가 어제도 비를 맞으며
굶었는지 발육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 거친 숲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내 걱정이 끝나기 전 고양이는 숲 속으로 사라지고, 이 산에 사는 들개들이
마구 짖어댄다.
아마도 고양이와 들개의 활동공간이 겹쳐 서로 영역싸움을 하는가 보다.
< 박주가리 >
며칠간 내린 비로 산길은 질퍽댄다.
의자에 앉아 운동화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려고 신발 바닥을 본다.
7년 세월을 편하게 신은 운동화 뒤축과 바닥이 많이 달았다.
운동량이 남보다 많은 고약한 주인 땜에 고생을 많이 한 운동화를 바라보며
초등학교 입학 때 신었던 하얀 운동화가 생각난다.
80kg의 몸무게를 매년 200만보 이상 7년 세월을 감당하였으니
바닥이 하얘질 때까지 달은 운동화에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운동화를 신고 걸은 거리가 1400만보×80cm=대략 11,200km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서울~부산 간 거리를 13번 정도를 왕복한 셈인가?
최근 14년을 탄 산타페와 17년을 탄 그랜저 승용차를 노후화로 폐차하였다.
지갑도 너덜너덜해지고, 운동화는 해지고, 등산화도 많이 달았으니
내 주변엔 낡은 물건투성이다.
황혼인생은 단순하고 평범하게 살아야 편한 법이다.
등산화·지갑과 운동화를 버리면 또 무엇을 버려야 할까,
정이 들어 애착이 가는 물건이라도 쓸모가 없어지면 버릴 수밖에 없다.
< 이질풀 >
여백(餘白)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검소함에 있다고 법정스님은
말했다.
몇 년간 읽지 않았던 책을 서가에서 빼기 시작한다.
버리고 비우면서 생긴 공간과 여백에 새로 산 책을 넣으며 버리는 것과
채우는 것 어느 삶이 지혜로운지는 나도 모르겠다.
얼마 후면 아직 살아보지 못한 종심(從心)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부터 내 삶의 공간과 여백을 만들기 위해 버리고 비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래도 90년대 초 열풍이 불었던 클린 오피스(clean office) 개념을
회상하며 땀을 흘리는 주말이다.
2020. 7. 24.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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