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12. 15;00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장맛비가 쏟아진다.
빗소리를 들으며 읽다 둔 장정일 작가의 '삼국지'를 꺼낸다.
젊어서부터 여러 번 읽었어도 삼국지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고 신바람이 난다.
젊어서는 정비석 작가의 삼국지를 읽었는데 지금은 장정일 작가의
삼국지를 읽는 거다.
예전 책의 활자크기는 대부분 8포인트로 글자가 작아 나이 든 사람들은
돋보기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읽기가 힘들다.
2004년 출간된 장정일 작가의 삼국지는 글자크기가 약 10포인트 정도로
읽기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건강했던 눈이나 원시에 노안(老眼)이 오면 돋보기를 쓰면 되지만,
근시인 사람에게 노안이 오면 돋보기는 쓸모없어 대부분 안경을 벗고
보는데 한참을 볼 수가 없다.
책을 펼친 지 20여분이 지나자 활자가 가물가물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배기 시작한다.
인공눈물을 넣어도 잠시뿐이라, 5분 이상 눈을 감고 눈에 휴식을 줘야
정상으로 돌아간다.
다시 20분후 책장이 흐려지기 시작해 아예 책을 덮는데 이 책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예전 같으면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답답해진다.
< 달맞이꽃 >
나는 참 지독한 책벌레였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을 빌리자면 책충(冊蟲)이 맞겠다.
책을 읽는 버릇은 테마(Thema)나 장르(Genre)를 가리지 않고,
숙독(熟讀)보다는 속독(速讀) 위주로 다독(多讀)을 하는 편이었다.
밥상머리에서도 책이 없으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책이나 신문을 읽어야 볼일을 볼 수 있었고,
침실에서는 단 몇 페이지라도 책을 읽어야 잠이 들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내 손은 빈손이 아닌 늘 책이 들려있었고,
심지어는 산에 갈 때도 배낭에 책이 들었고, 단체 산행이 아닌 나 홀로
산행일 땐 산의 한구석에 앉아 책을 읽다 하산을 하기도 했다.
책을 다독(多讀)하다 보니 새 책을 사려면 책값이 많이 들기에
동네 책대여점에서 무협소설과 만화책을 포함하여 2천3백여 권을 빌려
봤는데, 어떤 때는 볼 책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올 때도 많았다.
식탁에서 책읽기를 자제해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 지금은 식탁에서
자제를 하는데, 침실과 화장실에서 책 읽기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무슨 재미로 책을 많이 읽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에세이(essay)는 인생에 깊이를 더할 수 있어 좋았고,
밀리터리(military)에 관한 책은 원래부터 military mania라 좋았고,
무협소설은 인간이 불가능한 능력에 도전을 하고 공상을 즐길 수 있어 좋았고,
역사나 인문소설은 나의 지식을 한 단계 더 높이 함양(涵養)할 수 있어
좋았다.
한번 책에 빠지면 그 책을 끝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묘한 건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 이미 숙지한 문장을 다시 음미하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소설 속 등장인물과 동일한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 벌노랑이 >
끝내 올 것이 왔다.
나에겐 정년도 은퇴도 없을 것이란 마음으로 천하태평하게 지냈건만
어느 날 은퇴를 하게 되고, 또 어느 날 눈에 '황반변성'이 찾아왔다.
젊어서부터 많은 독서로 눈을 혹독하게 혹사(酷使)시킨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는 거다.
새벽에 잠이 깨어 산행을 하고 서재에 들어오면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이 된다.
아기들 챙기는 시간 빼곤 하루라는 시간이 모두 나의 자유, 내 마음대로다.
출근할 일이 없어 시간에 쫓기지 않기에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롭게 되었지만
눈(眼)이 변수가 되었다.
건강진단을 하면 혈압· 당뇨· 간수치 등 수치로 환산되어 나오는 모든 항목에
걸리는 게 없는데 유독 눈이 말썽이고 불치(不治)로 다스리며 살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비로소 보이고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눈을 감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순간들이 후회가 되어 가슴을 치고
정신없이 책에 빠져 눈 건강에 소홀했던 순간들이 아쉽다.
그러나 이 나이에 아쉬워하고 한탄만 할 일은 아니기에 나만의 아름다운
가치를 만들고 지켜야겠지.
< 쉬땅나무 >
나이가 들었어도
살아간다는 건 매일매일 새로운 길을 걷는 거다.
지금 생각나는 대로 졸필을 쓰기 위해 20분 이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다시 컴퓨터 화면이 흐려진다.
눈이 또 피곤해진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황반변성은 고칠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극복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잠시 눈을 쉬고자 창밖으로 눈을 돌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2020. 7. 12.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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