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6. 05;00
우울했던 하늘이 참지 못하고 강한 빗줄기를 뿌려댄다.
빗줄기가 기세등등할 때 나가봐야 옷과 신발이 잔뜩 젖을 거 같아
방안에서 서성거리며 비가 잦아들기만 기다린다.
종전 같으면 108배를 하며 차분하게 기다리겠지만,
종심이 되다보니 점점 꾀가 나 빗소리를 들으며 어젯밤 읽던 책을 펼친다.
문을 닫아걸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두문(杜門)을 해야될까.
모두가 잠든 새벽,
두구(杜口)로 입을 닫아버리니 빗소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이다.
06;00
빗줄기가 약해져 우산을 들고 산으로 향한다.
산기슭의 꾸불꾸불 이어지는 길을 오르며 잠시 사유(思惟)에 잠긴다.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있다.
곧게 뻗은 직선길이 있으면 이리저리 휘감아 도는 곡선길도 있다.
한숨마저 삼켜 버리는 낭떠러지 길이 있는가 하면 기화요초가 핀 꽃길도 있다.
웬만하면 또각또각 대는 내 발걸음소리가 들린 텐데,
잔뜩 물먹은 산길은 발걸음소리를 허용하지 않고 산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걷는 길,
누군가 수천수만 년을 걸었던 길,
산길 개망초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내 사유를 깬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나 잠시 메모창을 들여다본다.
메모창이 비었으니 정처(定處)없는 날인데 오늘은 어디로 갈까.
시간도 많으니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빗줄기가 점차 강해지니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다 산 정상을 향한다.
산길가 흙탕물 빠진 작은 도랑에 검고 보드라운 진흙이 쌓였다.
이런 진흙을 보고 '명개'라 하지.
정상부근에 핀 '금불초'의 꽃잎이 여러개 떨어졌다.
강한 빗줄기를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06;30
'제라늄'의 붉은 꽃잎이 나를 유혹한다.
옛사람들은 예쁜 여인의 입술과 하얀 치아를 단순호치(丹脣晧齒)라 표현했지.
사랑하는 여인의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바른 듯한 붉은 꽃잎을 바라보며
문득 명징(明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일반인들이 잘 쓰지 않는 깨끗하고 맑다는 뜻의 '명징'을 이 꽃에 쓸 수 있을까?
밝은 명(明)자를 파자(破字)하면 해와 달이다.
명개, 명징, 명견, 명감, 명경, 명관. 명군, 명랑, 명료, 명철, 명료 등
명(明)자가 들어가면 대개 좋은 뜻이기에 제라늄의 붉은 꽃잎을 보며 잠시 잃었던
생기를 되찾는다.
2021. 6. 26.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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