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635 적멸(寂滅)의 시간

김흥만 2021. 7. 11. 11:23

2021.  7. 11.  06;00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먼 하늘가에서 가까운 하늘로 시선을 옮겨 바라보다 우산을 펼친다.

 

어제 이 시간에도 많은 비를 뿌리고 먹구름이 사라졌는데

오늘도 똑같은 날씨가 반복된다.

 

적게 살아도 많이 살았어도 익숙하지 않은 인생길,

어제보다 다리가 조금 더 무거워지는 걸 느끼니

많이 살면 많이 산만큼 삶의 무게도 무거워지는 모양이다.

 

자연의 일상사나 사람의 일상사는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많다.

절정을 향해 여름은 마구 달려가고 산의 숲속은 수묵담채화를 마구 그려댄다.

나는 숲속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무한한 자유 속에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니 마음이 평화롭기만 하다.

 

06;24

폰의 알림을 무음에서 소리로 바꾸자마자 지인 모친의 별세 부고가 뜬다.

친구 부인의 직장암으로 인한 별세에 이어 또 들어오는 사망소식,

가던 길 멈추고 대장암으로 오랜 고통 속에 살았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통증이 심하면 살아있음이 고통일 수도 있다. 

나도 예전 통증이 심하면 간신히 잠이 들 때마다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영면(永眠)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뜨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살아가며 매순간 순간마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산길에서 이렇게 꿍꽝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들리면 온전히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 희열을 느낀다.

 

06;50

도라지꽃을 발견한다.

매일 이 길을 다녔는데 오늘에서야 발견하다니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나 보다.

 

초록 외엔 다른 색깔이 거의 없는 숲속에서 연분홍색 도라지꽃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무릎을 꿇고 카메라를 대지만 엎드리지 않아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예술적인 감각이나 운동은 몸치에 가깝기에 작품에 연연하지 않고 증명사진

정도의 사진이나 나오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도라지꽃에 집중을 한다.

 

07;00

꽃을 찍다보니 어느새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십여 분의 시간동안 나를 잊은 채 몰두를 하였으니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나 보다.

 

불교에서 열반(涅槃)이란 바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끄면 온갖 고뇌가 사라짐을 말하는데,

열반의 8종 법미(法味) 중 적멸미(寂滅味)는 미혹된 생사가 계속하지 않음을 말한다.

 

열반(涅槃), 적멸(寂滅), 이계(離繫), 해탈(解脫), 원적(圓寂)의 의미가 다 비슷하지만,

도라지꽃을 보며 잠시나마 번뇌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나에겐 십여 분의

시간이 적멸(寂滅)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꽃이 터지기 직전인 이 도라지는 파과(破瓜)의 기쁨을 나에게 주려나,

옆의 도라지꽃이 터지기를 기다리며 문득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한다.

 

오래 전 산에 가기 위해 새벽 6시에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운전기사와 제일 앞에 탄 승객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린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그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온몸이

처참하게 찢어져 죽었대요,"

성경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승객이 운전기사의 말을 듣더니

"아마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일찍 데려가신 모양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대화를 들으며 나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데려가려면 곱게 데려갈 일이지,

갈기갈기 찢어서 데려갈 게 뭐람, 하나님이라는 신은 신(神) 치곤 참 심술궂은

신일세"라는 생각을 했다.

 

법구경(法句經)에

위소부당위(爲所不當爲)라 "해서 안 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소적무회희(所適無悔悕)라 "가는 것마다 뉘우침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도반(道伴)의 길을 걷는 불교인도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종교인이라,

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엔 무수한 길이 있다.

그중에서도 어느 게 사람이 사람답게 가야할 도리(道理)의 길인지 도라지꽃을 보며

생각해본다.

       

                               2021.  7.  1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