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640 지렁이

김흥만 2021. 7. 31. 15:20

2021.  7.  31.  03;00

번쩍거리며 남쪽하늘이 갈라지고 이어지는 노기 띤 뇌성(雷聲)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쳐들어왔을까 서둘러 집안 한 바퀴를 돌지만 다행히 젖은 곳은 

없다.

 

오늘따라 뇌성벽력(雷聲闢靂)이 심하다.

어디엔가 벼락이 떨어져 '가붕개'가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까라는 노파심이 생기니

이 또한 노인지반인 모양이다.

 

활짝 피어 재잘거리던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은 세찬 소나기에 놀라 입을 다물었고,

잠귀신인 자귀나무의 공작새 깃털모양 꽃잎은 오히려 잠에서 깨어 수분을 마구

섭취한다.

                                                <  으아리 >

 

05;30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동편으로 몰려간다.

산길로 접어들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곳저곳에서 지렁이가 튀어나와 꿈틀거린다.

 

습한 지하에 살며 그 습기가 싫어 몸을 말리려 바깥으로 나온 모양이라,

한 마리 두 마리 또 한 마리가 꿈틀 거리며 산길 바닥에 널브러졌다.

 

허공에서 직박구리가 맴돌고 산비둘기가 호시탐탐 지렁이를 노린다.

새들도 무더위에 힘드니 이 지렁이로 몸 보양을 할 모양이라,

뜨거운 햇볕이 땅속까지 달궈 몸을 말리러 나온 지렁이들이 참변을 당하기

직전이다.

 

작은 놈은 언제 죽었는지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미들한테 끌려가고,

나는 나뭇가지를 주워 산 놈을 집어다 길섶으로 데려다 준다.

약육강식, 먹이사슬은 자연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인데 내가 괜히 오지랖을 떠는 걸까.

 

지렁이들이 제때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 염천(炎天)에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들어갔더라도 위험해도 살겠다고 또 땅 위로 나올 텐데,

건조한 시기나 겨울에는 약 2m 깊이의 굴을 파고 들어가는 토룡에 대한 걱정은

나만의 기우(杞憂)인가.

                                            <개쉬땅>

 

먹구름 사라지고 남은 엷은 구름을 뚫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혹서(酷暑)를 잠시나마 식혀줄 비를 맞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디선가 "맹"하니 다른 맹꽁이가 "꽁"하고 대답을 한다.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소리가 절실하게 들리니 이 근처에 물둠벙이 생긴 모양이다.

맹꽁이, 두꺼비, 개구리를 찾아 숲을 뒤지다가 바짓가랑이는 다 젖었고,

네 송이 핀 산도라지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다.

 

10;00

뉴스에 보기 싫은 얼굴들이 나오기에 서둘러 TV를 끄며 '가붕개'로 살기엔

인생살이 침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늙는다는 것은 고집이 세지는 만큼 약해지는 것이다.

약해지면 서럽지만 때가 되면 낮추고 물러서는 게 더 현명하다.

때로는 연약함이 겸손이 되고 지혜가 되는 법이라 생각을 바꾸려 한다.

그래도 정치하는 사람들의 노욕(老慾)과 노추(老醜)를 언제까지 보고 견뎌야 할까.

 

                                        2021.  7.  3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