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633 남산에서 만난 보물

김흥만 2021. 6. 30. 20:11

2021.  6.  29.  09;30

거대도시의 도심에 자리 잡은 남산(南山),

야생화의 보물창고인 남산의 숲에서 오늘은 어떤 보물을 만날까.

'분홍바늘꽃'을 보며 누군가 숨어 지낼만한 은일(隱逸)의 숲을 향한다.

                                       <  분홍바늘꽃  >

 

산을 좀 안다는 사람이라도 남산의 진면목(眞面目)을 모르는 사람은 남산을

가벼이 보는 경우가 많다.

 

기실(其實) 남산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 지역이든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산 4440개 중 남산이 101개로

가장 많고, 봉우리로는 국사봉이 80개로 가장 많다.

10;00

은퇴한지 13년,

또 한번 강산이 바뀌어야할 세월이 지났어도,

전 KB은행장과 동료 지점장과의 아름다운 인연은 변함없이 계속 이어진다.

 

세상에서 인연(因緣)으로 이어지기엔 우연(偶然)이 있고 필연(必然)이라는 법칙이 있지.

악연(惡緣)이 있으면 선연(善緣)이 있고, 기이한 인연으로 생기는 기연(奇緣)도 있다.

 

우리사회는 학연, 혈연, 지연을 3대 인연으로 꼽는다.

그러나 직장연도 3대 인연 못지않은 중요한 인연이라 함께 남산숲으로 스며든다.

 

'바위취'가 숲의 초입에서 나를 반긴다.

산을 누비며 꽃과 나무와 이름 모를 풀에 관심을 가진지 13년,

 

아는 꽃을 만나면 반가웠고, 어쩌다 모르는 꽃을 만나면 그 꽃을 알기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이책 저책을 찾아본 세월이 꽤나 쌓였다.

 

늘 다녀 익숙해진 길을 버리고, 다른 방향의 숲으로 들어서자 원시림이 전개된다.

정해진 길이 아니면 단 한 발짝도 들어서기 힘들 정도인 원시림을 가진 남산,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심에 있는 남산에 원시림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경이로운 남산의 숲,

성속(聖俗)을 가리지 않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1411년 경기도 장정 3000명을 동원해 20일 동안 소나무 100만 그루를 심었다는 

남산, 지금은 소나무가 얼마나 남았을까.

어느 전문가는 남산에서 소나무가 약 3만 600여 그루가 남았으며,

면적으로는 소나무가 26%, 신갈나무가 26%, 아까시나무가 33%라고 한다.

 

한 아름이 넘는 신갈나무, 떡갈나무,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늙은 소나무,

이리저리 엉킨 국수나무, 아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대나무, 서어나무가

점령한 숲길을 걷는다.

 

숲속에선 이따금 '후박나무'도 보인다.

울릉도에선 후박나무에서 나오는 달콤한 진액과 열매를 이용하여 '후박엿'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울릉도 '호박엿'으로 발음이 변하여 널리 사랑을 받는다.

 

산길로 들어서자 도심의 열기는 사라지고 숲속의 향긋한 냄새가 들어온다.

편안한 인연들과 담소를 즐기는 산길의 맞은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노인들이

다가오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게 구시렁거린다.

 

'구시렁대다'라는 말은 못마땅하여 잔소리나 군소리를 자꾸 되풀이함을 말하는데,

저 노인은 무슨 불만이 있어 구시렁댈까.

노인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내 상황과 결부시켜본다.

 

맞다,

최근 친구, 지인들과 만남에서 유심히 지켜보면 혼자 구시렁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느낀다.

충청도에서는 마음에 탐탁하지 않아서 낮은 목소리로 자꾸 혼잣말을 할 때 '궁시렁댄다'

라고 하는데 좋게 표현하면 독백(獨白)이라 할까.

 

독백은 자기 마음속을 혼자 말하며 상대에게 알리려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저 노인이 하는 행위는 독백일까, 아니면 구시렁댄다가 맞는지 모르겠다.

 

독백이건 구시렁대는 것 자체를 따지기는 힘들다.

나이를 먹으면 고집이 세지고, 주장이 강해지고, 라떼(나때)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니

대화할 상대가 점점 적어지는 거다.

문득 한자어가 아닌 수순한 우리말인 '구시렁댄다, 수굿하다, 우수리, 살랑살랑, 쪼매,

사랑, 어매'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10;30

바람이 살짝 불어와 내 몸을 스친다.

가벼이 불며 살랑살랑 대는 바람결에 몸을 맡기니 땀이 조금 식는다.

 

신산(辛酸)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틴 거대한 소나무아래 솔가리(갈비)와 솔방울이 많이

떨어졌다.

나이가 들면서 더울 때 조금 무리해 걸으면 어지럼증이 생기고,

목, 어깨, 허리, 무릎, 발목 관절 근육의 유연성과 탄력이 떨어짐을 느낀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고 아기를 바라본다.

나에게 천진난만(天眞爛漫)한 미소를 보내는 아기,

 

부처님 귀를 닮은 아기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꾀꼬리와 휘파람새가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참새, 박새, 쑥새, 콩새가 축하비행을 해준다.

 

남산의 숲속은 바람과 구름 그리고 초록의 세상이다.

또한 바람소리 새소리와 함께 갓난아기 우는 소리까지 들리는 소리의 천국이다.

여기에다 알파파(alpha波)를 내뿜는 물소리까지 들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과한 욕심이겠지.

 

산벚나무, 당단풍, 애기단풍, 가죽나무, 물푸레나무, 들메나무, 물오리나무, 귀룽나무,

리기다소나무가 빼곡한 숲에서 뜻밖에 '용머리꽃'을 만났다.

 

남산에는 나무 191종, 풀 361종 등 552종이나 산다는데,

야생화의 보물창고인 남산에서 드디어 '용머리꽃'을 만나다니 황홀해 한참을

들여다본다.

 

용머리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금강초롱과 비슷한 색으로 파란색과 섞인 보라색의 고운 자태는 한 폭의 수채화이다.

청초하면서도 신비한 용머리꽃에서 향기를 맡으려 허리를 숙여 코를 바짝 대본다.

                                     <  용머리꽃  > 

 

11;00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 들려도 명상이 되는 곳에서 재잘거리며 줄을 서서 올라가는

아기들을 만났다.

 

남산 숲에서 오늘 무슨 보물을 만날까 궁금했었는데,

산에서 만난 아기들은 도시생활과 정치공해에 찌든 심성을 맑게 해주고, 정신적 치유를

해주니 이 아기들이야말로 남산의 진정한 보물이 아닌가.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열려야 소중한 것이 잘 보이는 법,

오늘에서야 아기의 울음소리, 아기의 귀여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드니 이제 철이 드는 모양이다.

 

초록이 떨어지는 숲속에서 '도깨비가지꽃'을 보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12;30

애국가와 남산,

민족혼과 정체성이 스며든 남산,

우리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담은 남산에서 유체이탈(遺體離脫)을 멈추고 시끄러운 속세로

돌아온다.

 

개나 소나 말, 망둥이나 숭어가 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하는 나라,

내로남불의 나라이기에 '가붕개' 즉 가재, 붕어, 개구리로는 살기 힘든 나라.

 

이런 나라에서 삶이란 세월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 또한 살아남는 것이기에

누가 답을 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살아야겠지.

 

                                             2021.  6.  29. 남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