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63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김흥만 2023. 8. 27. 08:12

2023.  8.  27.  06;00

열대야가 사라진 오늘새벽 모처럼 늦잠을 잤다.

너무 시원해 30분만 더 자고 일어난다는 게 무려 2시간을 더

자고 앞산에 오른다.

 

지난주 금요일이었지.

약속시간인 오후 1시가 되자 귀한 인연을 이어가는 선배와

옛 동료들이 지하철 강동역 밖으로 나온다.

 

88년 올림픽을 전후해 주택은행 둔촌동 지점에서 만났으니

무려 35년이 훌쩍 지난 인연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 나이가 35~36살 때였다.

 

폐쇄적이고 개폼과 권위를 앞세우던 주택은행 인사부 문화가

싫어서 선택한 영업점이 둔촌동 지점이었지.

 

권위주의로 무장한 본점 참모부서는 체질상 어울리지 않던

나는 고객을 상대하며 직원들과 희비애환(喜悲哀歡)을 같이

할 수 있는 영업점이 은행에 입사한 처음부터 좋았다.

 

영업을 하며 차장, 지점장이라는 조직의 관리책임자가 되었고,

은행 지점장으로서 최고의 영예(榮譽)인 국은인상(國銀人賞)을 

타기도 했다.

                                     <   쉬땅나무   >

오래된 인연들과 막걸리잔을 비우며 이야기는 이어진다.

같이 근무할 때 있었던 에피소드(episode) 등 수십 년 전의

일들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다들 기억이 난다고 한다.

 

좋았던 인연들과의 추억은 기억이라는 방 한구석에 깊이

처박히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바로 튀어나오니 말이다.

 

최근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고 지난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문해피사'의 노인지반(老人之反)에서 '늙음의 증거'라던

대목이 생각나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한 동료는 나의 기억력에 대하여

"Input이 된 만큼 Output이 되어야 머리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또한 기억이 용량을 초과하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되지

않겠는가"라며 우려를 표명한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의 두뇌에는 약 210억 개의 뉴런(neuron), 즉 신경세포가

있는데 인간은 뇌의 용량을 10% 정도도 쓰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용량은 사실상 무한(無限)한 게 아닌가.

 

영원하길 바랐던 삶의 순간은 언제나 금방 지나간다.

물론 기억하기 싫은 순간들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것처럼 힘든 일도 없기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생에서 영원한 건 없다고 하지만 기억마저 사라진다면 

많이 슬플 것 같다.

 

기억을 영구보존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행복했고 좋았던 기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에 행복했던

순간들 속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욕심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겠지.

 

06;30

산길을 오르며 숨소리가 커지고 심장이 벌떡거린다.

요즘 '스테로이드' 약물치료에 체력이 많이 방전된 모양이니

나도 늙긴 늙었나 보다.

 

그러나 늙었으면 어떤가.

때로는 늙음이 젊음보다 좋을 때도 있다.

 

나의 생각과 결정, 내가 원래 가고자 했던 그 길에서 벗어났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믿어줄 수 있는 마음도 생겼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며 이해득실을 따지는 기심(機心)도

사라졌다.

비록 육신(肉身)이야 병들고 아프지만 이젠 욕심도 걷어냈고,

욕심을 걷어내니 몸과 마음도 개운해져간다.

 

아침 기온이 21도까지 떨어졌다.

폭염으로 나를 괴롭혔던 여름도 이젠 물러나는 모양이다.

한껏 교앙(驕昻) 대던 매미 소리는 작아졌고, 귀뚜라미 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자연은 어느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고 있다.

그 자연 속에 사는 인간 또한 변하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에서 어느 한순간도 어긋나지 않고 멈춤도 없다.

 

                       2023.  8.  27.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