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31.
인터넷으로 주문한 호루라기 45개가 택배로 도착해
지인과 친구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내가 쓸 호루라기는 달랑
2개만 남았다.
요즘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다."
'하 수상하다'라는 말에서 '하는 아주, 수상(殊常)은 평소보다
몹시 다르다'라는 의미인데,
내가 조선 인조 때 이조판서 최명길과 대척점에 있었던
예조판서(좌의정) 김상헌의 시조에 나오는 내용 중
'하 수상하다'라는 말을 쓸 줄이야.
우리나라는 치안이 좋은 나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밤에도, 인적이 드문 곳에도 겁을 내지 않고
국민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안전한 몇몇 나라에 해당이
된다고 했다.
요즘 '묻지 마' 범죄가 기승을 부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 "조심히 들어가, 들어가서 연락해"라는
겉치레 인사말이 어느 날부터 진심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어제도 오늘 새벽에도 앞산에 오를 때 내 손에는 등산용 스틱,
호주머니에는 비상 경보용 '호루라기'가 어김없이 들어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호루라기를 불어보니 소리가 제법 커
경보 역할을 톡톡히 하겠지만 호루라기를 부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악 듣기를 좋아해 늘 '골전도 이어폰'을 끼고 다녔는데,
돌발성 난청도 왔고, 주변을 경계하다 보니 이어폰은 설합
속으로 들어가 언제 꺼낼지 모르겠다.
길거리에서, 산길에서 음악 듣기는 사치가 되었고,
가끔 모르는 사람과 스쳐 지나갈 때 뒤통수가 싸해지면 나도
모르게 스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최근 칼부림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차로 일부로 들이박아
죄 없는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사람이 많은 백화점에서, 인적이 드문 동네 공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떠한 이유도 당위도 목적도 없는 사건이 마구
발생하기에 사람들은 내심 불안을 안고 각자도생(各自圖生)에
신경을 쓰는 세상이 되었다.
가장 안전하다는 나라에서 살아남기가 큰일이 되었다면,
이렇게 우리의 일상이 공포가 되는 순간이 계속 이어진다면
힘없는 소시민들은 어떻게 각자도생을 하여야 할까.
내가 그런 일을 직접 당하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
내가 있는 주변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호신용 경보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검색을 해보니 '후춧가루 분사용 스프레이,
누르면 소리가 나는 경보기, 삼단봉, 개스총'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그중 '호루라기'가 눈에 들어와 얼른 주문을 한 거다.
세상은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지고 있다.
치안이 강화되어도 한편에서는 폭력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선량한 국민은 일상의 두려움으로 불안하기만 하다.
어릴 때 골목에서 가지고 놀던 호루라기,
운동 경기장에서 심판이 불던 호루라기,
교통정리를 하며 교통경찰이 불어대는 호루라기가 각자도생의
도구가 되다니 참 묘한 생각이 드는 밤이다.
2023. 8. 31. 밤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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