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73 호빵맨 가을을 남기고 떠나다.

김흥만 2023. 10. 8. 11:24

2023.  10.  8.  05;00

스산한 '건들바람'에 한기를 느낀다.

며칠전만 해도 폭염으로 잠 못 이뤄 지새우던 밤이 이불로

온몸을 덮어야 하는 밤으로 변했다.

 

9월에서 10월로 달력을 넘기기가 무섭게 백로(白露)가 찾아왔고,

이슬 맞은 풀숲에서 바짓가랑이가 젖기 시작한다.

 

초가을에 선들선들 부는 바람은  '건들바람'이요,

이렇게 이른 가을에 부는 신선한 바람을 '색바람'이라 했지.

가던 길 멈추고 가슴을 열어 '색바람'을 깊이 들이마신다.

 

갑자기 따끈따끈하게 데운 삼립호빵이 생각난다.

지난겨울 2박스를 보관했는데 냉장고에 삼립호빵이 남아

있으려나.

                             <   붉은 서나물   >

 

07;30

냉동칸을 열어보니 송편만 남아있기에 휴대폰으로 호빵을

주문하려다 앱을 멈춘다.

 

아!

나보다 삼립호빵을 더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지.

유달리 호빵을 좋아했던 친구가 별세한 지 3일째니 오늘이

발인이구나.

 

엊그제 부음(訃音)을 받고 많이 속상해 눈물이 났었는데,

달력을 보니 친구가 '루게릭병'을 진단받은 지 어느새 1년이

지난 거다.

 

의사의 진단대로 1년 이상 더 버티지를 못하고 불귀(不歸)의

몸이 된 친구는 삼립호빵을 많이 좋아했다.

 

작년 추석 이후 느닷없이 찾아온 '루게릭병'으로 친구는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병이 조금 더  심해지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거 같아

서둘러 삼립호빵 40개를 주문해 보냈다.

 

호빵을 다 먹자마자 예상대로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져 죽과

미음도 다시 갈아먹어야 겨우 소화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위(胃)에 직접 음식물을 공급하는 장치를 달아야 했다.

 

음악, 역사, 정치 등 인문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대화가 통했기에 통화를 하고, 문자를 보낼 수 있을 때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그 와중에 나도 위암진단을 받았고, 돌발성난청 등 온갖

신체의 악재에 시달리느라 문병을 가지 못했는데,

폐렴이 왔다는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타계(他界)를 하였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문제는 또 생겼다.

어제 문상(問喪)을 가려고 준비를 하다 포기를 했다.

 

지난 4일 위암 진행상태 확인을 위한 2차 내시경 검사가

있었고,

수면 검사가 끝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걷다가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 이마와

손을 심하게 다쳤다.

 

다친 부위와 컨디션 난조로 장례식장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도로 주저앉았으니 문병도, 문상도 하지 못한 이 죄를

어이할까.

 

친구가 낚시를 좋아해서 낚시터가 있는 집으로 귀촌(歸村)을

했고,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고향에 간 거처럼 마음이 늘

푸근하고 편안했다.

 

그의 깊은 학식(學識)과 상식(常識)에 반했는데 이젠 누구를

그리워하고 누구와 대화를 할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허전하다.

 

쪽빛 하늘에 한 무리 기러기떼가 끼룩끼룩 대며 날아가고,

박목월 시인이 쓴 시에 김성태가 작곡을 한 '이별의 노래'가

생각난다.             

   

   [     ♬ 기러기 울어 에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         ]

 

종심(從心)이 되니 친구들의 별세(別世)가 이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세상을 털고 훌훌 떠나기에 애써

일상에서 초연(超然)해지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냥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연연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평화와

고요, 그리고 고독을 느낌은 늘그막에 찾아온 신의 은총이

아닌가.

                                   <   쑥부쟁이   >

 

08;00

쪽빛하늘가에 뭉게구름 피어난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

친구는 55년의 추억과 가을을 남기고 '붉은 서나물'처럼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되어 떠나갔다.

 

한유(閑遊)의 복을 누리고 싶어 호빵을 주문하려다 먼저 간

친구가 마음에 걸려 주문을 하지 못하는 아침,

 

감나무에 매달려있던 마른 잎사귀가 힘없이 떨어지고 몇 개

남았던 감도 덩달아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사 모든 것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로다.

 

                                2023.  10.  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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