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8.
이맘때 자주 보는 것이 벌거벗은 나무의 모습이다.
나뭇잎을 몽땅 떼어버린 나목(裸木)은 태어날 때의
아기 모습과 비슷해 숨김이 없다.
그토록 화려하게 단풍 들었던 나무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북풍한설(北風寒雪)에 오들오들 떠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며,
하루 전 스스로 자진(自盡)한 배우 故 이선균을 떠올린다.
경찰의 공개 소환조사에 임하며 잔뜩 겁먹고 긴장한 얼굴로
90도 폴더인사를 하는 약한 모습에 엄청난 이 파고를 제대로
넘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사와 매스컴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그는
끝내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소식을 뉴스로 전해 들으며 온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20; 20
TV에서 우연히 '코끼리 사진관'이라는 프로를 시청한다.
베테랑 강력계 형사인 김장수 경감 편이 끝나고,
29세에 순직한 전투기 조종사의 사연을 보며 메말랐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F-5E 전투기 조종사로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키다가 전투기와
함께 산화한 故 심정민 소령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다.
2022년 1월 11일 공군 전투기 1대가 기체결함으로 화성시의
한 야산에 추락했다.
공군 조종사인 심정민 소령은 10초 가량의 충분한 비상탈출을
할 시간이 있었지만 다른 국민이 피해를 당할까 봐 마지막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스스로 희생을 선택했다.
산화해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된 영웅 심정민 소령과
그날의 일상에 멈춰진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가인, 배성재 두 MC는 물론 내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불과 8초의 여유시간,
블랙박스에서는 이젝션(ejection)! 이젝션! 두 번 들리고
10초의 여유 시간에서 불과 2초면 탈출할 수 있었던 시간을
민간인이 희생될까 봐 탈출하지 않은 故 심상민 소령,
영웅이 산화한 그 자리를 잊지 않고 종종 찾아 기도를 하는
교회 목사,
심소령의 학업성적과 인성, 리더십, 그리고 친구들과
카멜레온처럼 맞춤 우정을 나눴다는 고교 담임 선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으며 참군인의 표상(表象)을 보게 된다.
프로가 끝날 무렵 '코끼리 사진관'의 사진사가 AI로 만든
심정민 소령과 부모, 누나가 같이 가족촬영을 하는 장면에선
가족들도, MC도 나도 울었다.
TV를 끄고 가수 김호중이 부르는 '다시 한번만~'을 듣는다.
~~♬ 너를 보내고 너를 잊으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중략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난다.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
유가족들의 지금 심정이 이러하겠지.
영혼의 울림이 있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아려온다.
21;00
TV 뉴스에선 국민을 팔아먹는 간신 모리배(謨利輩)들이
화면을 도배했다.
겉으로는 깨끗한척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을 한 정치인들의
내로남불과 양두구육(羊頭狗肉)을 보며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연다.
세이(洗耳)와 세안(洗眼)이 필요할까.
이럴 때는 가만히 내려놓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이
먼저다.
어둠과 가로등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침정(沈靜)의 세계로
들어가 고요함에 잠긴다.
창밑에 서있는 목련나무의 동아(冬芽)가 제법 자랐다.
봄이 머지않은 곳까지 다가 온 모양이다.
2023. 12. 2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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