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81 삶의 과정(過程)

김흥만 2023. 12. 10. 11:38

2023.  12.  08.  08;20

다문화 센터에 출근하여 베란다로 나간다.

화분에 심었던 고추와 가지, 토마토가 말라비틀어지고

축 늘어졌다.

 

얼마 전 단 며칠이라도 더 살리려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고

물을 조금만 주었는데도 고추 등 채소류의 생명이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 수명이 다한 거다.

 

고추 등 일년초는 자연의 생육성쇠멸(生育盛衰滅) 법칙에

따라 때가 되면 다 죽는다.

다른 쪽에 놓인 여러 개의 일일초(日日草)는 아직 살아남아

겨울바람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는 작은 생명 또한 고귀하기에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화분을 옮긴다.

 

09;00

어느새 12월,

연말이 20여 일 정도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센터에 알바를 다닌 지도 어언(於焉)

3년이 되었고,

그 3년이라는 세월이 순간(瞬間)이 되어 사라졌다.

 

일일초 (日日草) 앞에 우두커니 서서,

사라진 인생길을 따라 내가 얼마나 왔을까 뒤돌아 보니

사라졌던 청춘이 보인다.

 

숱하게 느꼈던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에 가슴 아파

울고 웃었던 나의 인생길이 저만치였구나.

 

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파문도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에

낚싯대를 담갔던 세월이 다 사라졌다.

 

산에서 만난 오솔길과 비탈진 고갯길, 너덜너덜대는

너덜길을 오르며 걸음걸음마다 뿌리던 땀방울도 사라졌다.

 

외진 산길에서 만난 야생화 한 포기에 설렜던 가슴도 

서서히 메말라간다.

그러고 보니 희희낙락(嬉喜樂樂)하던 청춘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나만 지나간 줄 몰랐던 모양이다.

 

은퇴 후 찾아온 임서기(林棲期)와 방랑기(放浪期)에 전국의

산을 누비며 세월을 잊으려 했는데,

어느 날 길가에 걸린 현수막에 끌려 면접을 보고 알바

근무를 한지 3년이 훌쩍 지나간 거다.

 

처음엔 참 어색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컴퓨터나 보고 어떨 때는 그냥 멍하니 앉아 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결혼을 목적으로 외국에서 이주한 젊은 여성들이 드나드는

사무실이라 눈길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을 했고,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 가급적 대화를 하지 않고 목례로

인사를 했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외국여성, 또는 국적취득을 위해

애국가 연습을 하며 안간힘을 쓰는 여성들 사이에서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나 다름없었다.

 

30년 넘는 은행생활, 10년 넘는 지점장 생활동안 몸에 밴

권위가 혹시라도 아직 남았을까, 또는 목에 힘을 주지나

않을까 디테일(detail)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20~30년이나 어린 외국여성들과 어쩌다 대화를 할 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더니 어느 날부터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나에게 사회적 체면이 아직도 남아있는가,

내가 어땠었는데라는 과거 생각에 사로잡히지나 않았을까,

 

인고(忍苦)의 자기성찰(自己省察) 시간을 거쳐 이제는 

도서 정리, 사무실 정리, 교육준비, 청소 등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은 나의 몫이 되어 스스럼없이 척척 처리를 한다.

 

10;00

말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계절처럼 계약

기간이 끝나간다.

나는 또 새로운 일 년을 위해 구직 신청서를 작성했다.

 

여성같이 통통하고 예뻤던 손등도 이젠 주름투성이다.

정자체(正字體)로 쓴다고 애썼지만 마비된 팔은 구직

신청서에 비뚤어진 글자만 남겼다.

 

가까운 친구는 탄생과 죽음, 아픔도 삶의 과정(過程)이라

했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나머지 생애에도 삶의 과정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리라.

 

                            2023.  12.  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