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3. 11;00
새벽부터 내리던 '는개'가 잠시 그쳤다.
여자경이 지휘하는 대전시향에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5번 2악장을 연주하고 나는 그 음악에 빠져든다.
머리가 몽롱하다.
교향곡을 한참 듣다가 깜빡 졸았나 보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 창밖을 내다보니 잠시 멎었던
는개가 다시 내린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제주도와 아랫녘에는 많은 비가 내린다는데 여긴
비 다운 비가 내리지 않고 는개처럼 찔끔찔끔 내린다.
비가 찔끔찔끔 내린다 해서 '찔끔비'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옛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불렀다.
지금같이 살짝 내리는 비를 '는개'라 했다.
빗줄기가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늘기에
는개라 했는데,
어느 친구는 는개라 했더니 '논개비'가 아닌가라고
반문을 한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倭將)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한 관기 '논개'가
죽은 날 '가는 비'가 내려 논개라 하다가 '는개'가 된 게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전혀 아니다.
2012. 1. 26일 전북 장수 장안산(1,237m)에 올랐다가
들머리에 있는 논개 생가와 사당에 참배하였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 중 하나가 논개가 기생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과연 맞을까.
논개의 사당에는 논개의 정확한 이름은 '주논개'요,
경상 우병사인 최경희의 부인으로 기록하였으니 관기
(官妓)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 이름으로 붙여진 비로는 태종우(太宗雨)가 있다.
가뭄이 극심할 때 태종이 죽으며 세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어 혼이 있다면 옥황상제에게 부탁해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면 거의 비가 내렸다.
1996년부터 방영하였던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으로 분장한 탤런트 유동근이 대궐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비를 주옵소서!"
라며 하늘에 대고 절규를 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러나 의인화(擬人化)된 비는 태종우 정도이고,
조상들은 비에 대해 대부분 섬세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선택하고 그 비의 성격에 맞춰 이름을 지었으니 얼마나
지혜로운가.
가늘고 잘게 내리면 잔비,
싸라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면 싸락비,
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면 안개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늘면 이슬비,
이슬비보다 더 굵다고 생각이 들면 가랑비,
실같이 내리면 실비,
모낼 무렵에 내리면 목비,
봄에 내리면 바로 일을 하라는 일비,
여름철에 내리면 일을 못해 낮잠이나 자라는 잠비,
가을에 내리는 비는 수확이 풍성해서 떡을 해 먹으라는
뜻의 떡비,
가루처럼 뿌옇게 내리면 가루비,
땅바닥을 두드리듯 오는 날비,
채찍처럼 굵게 촥촥 쏟아지면 채찍비,
굵고 거세게 내리는 작달비,
달구로 짓누르듯 거세게 내리는 달구비,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면 발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억수,
줄기차게 내리다가 금세 그치면 웃비,
한쪽으로 해가 나면서 비가 내리면 해비,
오래오래 내리면 궂은비,
예기치 않게 밤에 몰래 내리면 도둑비,
햇볕이 있는 맑은 날에 잠깐 내리면 여우비,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먼지잼이,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듯 떨어지면 꽃비,
음력 보름에 내리면 보름치,
그믐께 내리면 그믐치,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말라 버리면 마른 비,
농사짓기에 딱 맞게 내리면 꿀비,
요긴할 때 내리면 약비,
장맛비는 오란비,
우레가 치면서 내리면 우레비라 했고,
이밖에도 소나기가 한쪽에는 오고 바로 옆에는
안 오면 '소잔등비'라고도 했는데 마침 장마가 시작
되었다.
이제부터 내리는 장맛비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내릴지 어떤 이름이 적당할지 관찰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바람도 특징을 따라 이름을 재미있게 지었다.
이른 봄철 잎이 날 무렵에 부는 잎샘바람,
이른 봄철 꽃이 필 무렵에 불면 꽃샘바람,
뱃사람에게 북동풍이 불면 높새바람,
서쪽에서 불어오면 하늬바람,
남쪽에서 불어오면 마파람 등으로 불렀고,
구름도 매지구름, 삿갓구름, 꽃구름 등으로 지었다.
눈도 함박눈, 싸라기눈, 살눈, 길눈, 숫눈
물도 가람, 선샘, 옹달샘, 개울, 여울, 샛강, 개,
파도(波濤)도 물결에 따라 메밀꽃, 까치놀, 너울로
지었기에 한 단어 한 단어씩 음미하면서 우리말의
몰랐던 뜻을 알게 되며 탄복을 한다.
영어로 비는 rain 또는 heavy rain 정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고작 雨, 暴雨 정도로만 표현하는
비에 비해 우리나라의 다양한 이름은 얼마나 예술적이고
감성적이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정서가 녹아든 이름인가.
그러나 인터넷과 AI시대라 우리의 아름다운 말이 많이
파괴되고 점점 사라지기에 안타깝다.
언어와 글에는 그 나라 민족의 철학과 사물을 대하는 시각,
마음가짐이 들어있는데 말이다.
11;30
차이콥스키 교향곡은 끝나고,
이어서 슈만의 현악 사중주 제1번 3악장의 선율이
흐른다.
뛰어놀던 아기들도 집으로 들어갔는지 창밖은 침묵의
세상으로 변했다.
말은 줄이고, 조금이라도 글이 길다 싶으면 글도 줄여서
쓰는 시대가 되었다.
눈을 감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재주 없는 졸필이나마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해봐야겠다.
2024. 6. 23.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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