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5. 11;07
나는 지하철을 타는 시간도 그냥 허투루 흘리지 않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님 조용히 지나갈까,
자리에 앉아 슬며시 주위를 둘러본다.
눈을 감았다.
개념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인데,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마음을 챙기는 명상'이라 할까.
옆사람이 모를 정도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들숨과 날숨이 끝나자 호흡의 감각이 조금씩 달라진다.
잠시 명상(冥想)을 빙자한 '멍 때리기'를 하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생각의 물줄기가 터졌는지 별별
생각이 마구 떠오른다.
내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가방에서 꺼낸 책에 집중을
하고 내 앞 맞은편에 앉은 젊은 여인도 책을 읽는다.
지하철 좌석에 앉은 사람 거의 모두가 휴대폰을 보고
있던지 아니면 눈을 감고 있는데,
책을 보는 사람이 두 명씩이나 되는 풍경이 조금 생경
(生硬)하다.
스마트폰 시대가 그렇다.
조금이라도 멀리하면 허전하고 옆에 폰이 없으면
무엇인가 잊은듯한 느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스마트폰 중독시대는 하루이틀 된 게 아니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미 중독이 예견된 게 아닌가.
앉기만 하면 스마트폰부터 꺼내고, 위험에 둔감한 건지
폰을 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심지어는 폰을 보며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
其數)다.
예전에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하철 입구에서 공짜로 주는 무가지(無價紙)를
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손에서 책은 사라지고
스마트폰을 보던지 귀에는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꼽고
눈을 감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늘 책을 가까이 했다.
집이나 이동 중에도 내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고,
심지어는 식탁이나 침대, 화장실에도 책이 있어야 마음이
편했는데 은퇴 후 황반변성이 오면서 독서를 제대로 못해
답답하다.
지금 지하철 안 내 옆에서 그리고 앞에서 책을 읽는 여인이
여느 흑백영화의 주인공처럼 예뻐 보인다.
홀로 조용히 책을 읽는다?
다른 사람들은 귀를 이어팟으로 밀봉을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얼굴과 영혼을 처박고
있는데 말이다.
< 괴불주머니 >
나는 주판세대이다.
전자계산기와 컴퓨터가 나오기 전 복잡한 계산은
주판으로 처리했고, 간단한 건 암산으로 처리했다.
통신수단도 삐삐를 거쳐 손바닥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크고 인터넷이 되지 않는 휴대폰을 거쳐 비로소
스마트폰 세대가 되었다.
얼마 전 오래된 박스에서 옛날 사용했던 주판을 찾았다.
그 주판은 1967년 둘째 형에게서 물려받았고, 보급
행정병이었던 나와 군대생활을 같이 하였다.
제대 후 컴퓨터가 없던 시절 은행에서 계산용으로도
사용했던 주판인데 제작된 지 60년이 가까워지자
주판알을 끼운 나무가 삭아서 수리가 불가능하다.
삐삐도 찾았다.
삐삐에 번호가 뜨면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를 하곤
했는데 그 삐삐도 상당 부분이 삭아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군대에서 34개월간 목에 걸었던 인식표도 48년 만에
찾았다.
<육군 군번 64034488 김흥만 A형>이라는 인식표를
만지며 금세 20대 피 끓는 청년으로 돌아갔다.
세상은 점점 좁은 휴대폰 속으로 들어가고,
휴대폰 밖의 세상은 디지털에 어두운 사람들과
노인들만 남는다.
어느 지인이 종이책을 출간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전자책 쪽으로 관심을 가지라고 권유를 했다.
나같이 구세대 사람들은 전자책을 읽는 거보다 종이책을
읽는 게 더 편하고, 주변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며
평화를 느끼는데 말이다.
인간세계는 침체와 소멸의 수순을 밟으면서도 AI시대로
빠르게 진화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든든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다.
세월 따라 육체가 노쇠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더 늦기
전에 전자책에 도전을 하고자 자료를 찾기 시작한다.
2024. 6. 25.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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