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6. 05;00 영하 5도
교교(皎皎)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가 길게
끌려온다.
내가 저렇게 컸었나,
내 몸의 두 배가 넘는 그림자가 나를
땅바닥의 몬스터(monster)로 만들었다.
바람이 분다.
마스크 사이로 스며드는 칼바람이 매서워
넥워머를 올리고 방한모 날개를 내려 귀를
감싼다.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맥놀이 치는데 어느새 보름이 지나갔고,
아직 찌그러지지 않은 보름달이 온누리를
차디찬 달빛으로 감싼다.
새벽추위가 부담스러워 며칠간 늦잠을
즐겼더니 체중이 2kg 이상 불었다.
추위대비 완전무장을 하고 황산(荒山)
숲길을 오르내리면 500g 정도는 빠지겠지.
웬 비석이지?
지박령(地縛靈)이 맴도는 담장가에 보이지
않던 비석이 서있다.
비석은 며칠 전에 세운 모양인데,
병자호란 당시 공을 세운 밀양박씨 박경응
에게 인조임금이 이곳 황산(荒山) 땅을 하사
하였고,
후일 삼일운동 당시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는
내용이다.
수년간 거의 매일 이곳을 오르내리며 전혀
몰랐던 역사적인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의 무지몽매(無知蒙昧)함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거친 뫼(山), 즉 이곳 황산 근처에는
고 김용기 장로가 세우고 운영하던 '가나안
농군학교'가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라는 교육이념으로 교육과 노동을
통한 의식교육을 하였고, 그 정신 교육은
새마을 운동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주택은행에서 대리급 책임자로 임용되면
필수코스로 1983년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교하여 삼박사일 교육을 받았는데,
닭장을 개조한 숙소에서 자고,
치약은 3mm만 짜고, 비누를 쓸 때 남자는
두 번 여자는 세 번만 비벼야 한다며
절약정신을 강조했던 교육이 생각난다.
방한복의 무게 때문인지,
며칠 운동을 하지 않은 게으름으로 근육이
빠졌는지 제법 숨이 가쁘다.
이럴 때는 등산용 스틱이 효자노릇을 한다.
스틱에 체중을 약간 쏠리게 하고,
윤극영 작가의 '반달'이라는 동요를 읊조리며
미음완보(微吟緩步)를 한다.
걸음수가 7 천보를 넘어서며 climbers
high가 왔는지 몸이 한결 가벼워졌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들리는 헬스장에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을 즐긴다.
어쩌면 산과 숲의 정기를 받은 숲길을 걷는
운동이 내 체질에 딱 맞는 모양이다.
06;00
잠시 쉬어볼까.
아이테코 앞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열선을 깔았는지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의자는 따뜻하다.
그러고 보니 버스정류장 의자에는 처음
앉아본다.
수년 전 집 앞에 지하철이 들어왔다.
나는 이동할 때 가급적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 노선표와 시간을 먼저 확인 후
이용하는 버릇이 생겼다.
간혹 목적지가 지하철이 닿지 않는 곳이면
당혹스럽기도 하니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이
나의 장소 감각을 지배하게 되었다.
버스 정류장 전광판에는 노선버스 번호별
도착 예정시간과 혼잡여부가 뜨고,
캐노피 쪽에는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보내
주는 기계도 달려있다.
세상에~다른 나라도 그럴까.
대한민국은 정치권을 빼고 참 살기 좋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버스는 BRT로 승객을 신속하게 이동시켜
주고 지하철은 정확하게 시간을 지켜준다.
이렇게 국민을 위해 디테일(detail)하게
서비스를 해주는 나라가 또 있을까,
더럽고 냄새나던 프랑스의 테제베(TGV)를
떠올리며 늦게나마 감탄을 한다.
궁둥이가 따끈따끈해진다.
일어나기가 싫어 5분만 더 앉아있기로 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성심병원에서 온 알림을
확인한다.
내일 췌장 관련 MRI 검사결과가 나온다.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었는데도 CT검사에서
췌장 앞머리 부분에 15mm 정도 신물질이
발견되었고 암코드가 부여되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CT 판독대로 췌장암으로 확정이 된다면?
갑자기 불안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 우리나라 의사와
병원을 믿고 대처하면 되기에
오늘 일은 오늘로, 내일 일은 내일 걱정
하기로 하고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걷는다.
방금 교대를 마친 경비 아저씨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주머니에서 비상용 초콜릿
두 알을 꺼내 건넨다.
2025. 1. 16.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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