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6. 15;00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오후 네시부터 눈이 내린다고 했는데
또 일기예보가 틀리려나.
매서운 겨울바람만 허공에 가득 찼다.
지금 하늘의 분위기로 봐서는 눈은커녕
아무것도 하늘에서 내리지 않겠다.
16;00
오후 네시가 되자 눈발이 날린다.
눈발로는 성이 덜 찼는지 하늘은 거짓말처럼
함박눈을 만들어 지상의 더러움을 흰색깔로
지워 나간다.
거실의 유리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서성이다가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눈 내린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백설은 어느새 발목까지 차오른다.
비상등을 켠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거북이 신세가 되었고,
나는 한 손에 우산을, 다른 한 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걷는다.
눈속으로 사라지는 빨간 산수유 열매를 아웃
포커싱(out focusing)으로 찍다가
어느새 콩알만큼 커진 겨울꽃눈(冬芽)을
발견한다.
겨울 중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인 1월
20일도 영상 기온일 정도로 유난히 춥지
않았던 이번 겨울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겨울이다.
겨울은 사람들과 자연이 방심할 틈도 주지
않고 2월 들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혹한과 폭설이 몰아친다.
꽃나무들이 냉각량(冷却量)을 제대로
쌓지 못해 꽃을 제때 피우지 못할 것을
염려한 자연이 정신 차렸나 보다.
그러고 보니 목련도 동아가 제법 커졌다.
미련한 사람들이 싸움질만 하는 혼돈(混沌)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데
자연의 나무들은 제각기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구나.
자연도 인간세상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저 나무들은 냉각량을 충분히 채우고 나서
적당량의 가온량(加溫量)을 받아들인 후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펑펑 쏟아지는 눈이 더럽혀진 세상의 길을
지워 나간다.
그래도 저 길은 세상살이 자체가 아픔이라는
걸 기억하겠지.
아픔을 느낄 때 세상 사람 모두가 비명을
지르지는 않는다.
난세를 살아가며 아파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고통을 삼키며 흔들리지 않는 것도 작지
않은 일이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영원할 수는 없다.
아픔이 극에 달하면 끝날 때가 된 거다.
혼돈의 세상에 사는 우리들도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참담한 고통에서 벗어나리라.
2025. 2. 6.
석천 흥만 졸필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림의 미학 868 낯선 얼굴 (0) | 2025.02.01 |
---|---|
느림의 미학 867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0) | 2025.01.27 |
느림의 미학 866 나에게 도장(圖章)이란~ (0) | 2025.01.21 |
느림의 미학 865 4분 만에 반전된 췌장암 스토리 (1) | 2025.01.18 |
느림의 미학 864 내일 일은 내일에 (1) | 2025.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