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8.
천천히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휴대폰도 지갑과 시계도 다 두고 배낭 하나만 둘러맨 체,
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빠져들며 천천히 걷고 올라야 하는데,
늦은 밤 12시에 떠날까 아님 일찍 떠날까 망설이다 일찍 남도여행길을 떠난다.
400여 km를 달려 섬진강 하동에서 벚꽃 길 따라 쌍계사로 올라가니
섬진강에 꽃이 피었다.
봄날의 섬진강은 떨어지는 매화꽃잎과 활짝 핀 벚꽃의 강이 되었다.
강물에 꽃그늘이 늘어지고 꽃잎이 강물에 흩날린다.
맑은 햇살을 받은 은모래는 반짝이고 강물은 출렁이는구나.
이쪽은 전라도요, 강 건너 저쪽은 경상도인데
전라도에는 매화가 많고 경상도는 벚꽃이 많으니 이것도 지방의 특색인가.
살구나무에도 진홍빛 꽃이 피었고, 청매화에도 푸른빛이 감도는 꽃이 활짝 피었다.
들끓는 인파에 휘둘려 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올 것 같지 않은 봄이 한꺼번에
온 모양이다.
홍매화, 청매화의 예쁜 꽃봉오리 떨어진 사이에 파란 잎은 나기 시작했고,
부드러운 봄바람에 벚꽃이 휘날리니,
겨우내 꽁꽁 얼었던 동심(冬心)은 어느덧 춘심(春心)으로 가득 찬다.
평일인데도 쌍계사 길은 시장 통이고 잘 안 잡힌다는 강굴은 음식점마다 산더미
같이 높이 쌓아놓고 호객을 해도 한 점 맛보지 못하고 가는 심정 어이할꼬.
화개장터의 소음은 남대문시장 못지않게 크고 소란스럽다.
오후 6시 15분경이 일몰 예정시간인데 아직도 두 시간 반이 남았으니,
순천만 갈대숲에 사방으로 깔아놓은 데크를 천천히 걸으며 용산 조망대에 오른다.
작년에 땀 흘리며 올랐던 조망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데크를 깔아 편안한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흙길, 돌길을 밟지 못하니 못내 아쉬움이다.
잠시 흙길이 나오며 길가에 뱀무인지, 양지꽃인지 모를 정도로 조그만 야생화가 피어있다.
나무 발판만 있었던 조망대는 수만금을 들인 현대식 조망대가 들어서 나그네가 쉴 공간까지
만들었다.
훌륭한 자연자원을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만들려 노력하니,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잃었고, 군데군데 갈대를 잘라내어 만든 조형미가 더욱 어색하고 우습기만 하다.
이젠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으련다.
자연의 순수함과 위대함을 보고 싶어 은퇴 후 2년여 세월을 정처 없이 떠돌았는데,
인위적으로 가미 가공한 모습을 보니 역겹기만 하다.
습지의 갈대를 베는 일꾼들의 등엔 땀이 가득 배었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렇게 예산이 많으면 빈민구제 등 돈쓸 방법이 많을 텐데,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단기 업적주의를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자연의 때 묻지 않은 모습 그대로 수십만 평의 갈대 습지와 흑두루미, 농게, 백로를
보여주면 차라리 좋으련만,
세계 5대 연안습지로 꼽히는 순천만은 연간 3백만 명이 찾는 생태관광의 보고이다.
'순천자존 역천자망 順天者存 逆天者亡'이라 <명심보감 제2편 천명편에서 공자님 말씀>
즉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은 살고 거스르는 사람은 망한다고 한다.
하늘이 준 자연을 잘살려 자연과의 공존을 통해 생명의 정원으로 성장하여야 하는데,
너무 돈을 많이 들였다.
데크를 따라 걷다보니 흑두루미 2마리가 비상을 한다.
봄이 왔는데도 시베리아로 돌아가지 않으니 텃새로 바뀌었나 보다.
일몰까지는 아직도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하는데,
부드러운 바람이 순천만에서 동천을 따라 용산 안쪽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동천은 바다에 합류하기 직전 미인의 허리처럼 날렵하게 S라인으로 비틀며 휘어진 물길을
만들었고 살짝 해무가 끼며 서산엔 옅은 구름이 앉기 시작한다.
여수로 들어오니 종승이의 옛 직장 극동건설 후배들이 생선회 식사 대접과 예약한 호텔 열쇠를
준다.
은퇴한지 10년이 넘는데도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만나고 있으니 넉넉한 인격을 보여준다.
한잔 술에 쿨쿨!!
봉길이 코고는 소리에 새벽 네 시부터 엎치락뒤치락 한다.
당초 예정했던 향일암은 가지 못하고, 검은 모래해변으로 일출 행을 한다.
지나는 길에 이정표를 보니 만흥길이다.
어차피 내가 오는데 흥만길로 바꾸면 안되나?
바닷가이니 바다에서만 태양이 떠오르는 줄 알았는데 산에서 장엄하게 떠오른다.
일출의 바다를 보노라니 지난 세월이 그리워진다.
굴곡진 삶도 별로 없었지만 앞만 보고 살아왔던 삶이라,
이젠 뒤도 돌아보고, 옆도 돌아보고 넉넉한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500여 km를 달려와 일출을 보다니 멀리도 왔다.
아침바다에 갈매기는 없고 빈 배만 떠있다.
산도 바다도 나도 붉어진다.
영취산(靈鷲山)은 수리 취, 독수리 축자를 쓰는데 왜일까?
영취산이란 원래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주위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의 설법장소로 유명하며.
통도사의 뒷산도 영취산인데, 혼동될까봐 통도사는 아예 영축산으로 표기한다.
고려 명종 25년에 세워진 천년고찰 흥국사 옆길로 영취산 산행을 시작한다.
흥국사는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보조국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입구에 위치한 홍교는 보물 제563호이며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대웅전은 보물 제369호이다.
임진왜란 때 경내에서 300여 명의 승병 수군이 조련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오늘 나 석천 김흥만은 호강한다.
해변도로도 만흥 길이요, 절도 같은 흥자 돌림인 흥국사다.
딱따구리의 구멍 파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오늘 산행은 철저히 우리 4명뿐이다.
활짝 핀 동백꽃을 보며 천천히 올라간다.
연애를 하는지 두 그루의 벚나무가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서어나무가 참나무를 밀어내며 이 산의 아래를 지배한다.
계곡물은 명경지수이다.
남쪽지방이라 봄은 선뜻 다가와 연두색 비치는 계절이 되었나 보다.
눈 녹은 물이 제법 소리 내며 흘러간다.
저 물은 굽이쳐 흘러가며 소를 이루고 내를 만들며 바다로 흘러가겠지.
능선 따라 흰 구름이 하늘 금을 넘어온다.
서둘러 정상에 오르고 헐떡이며 봉우리를 밟아 나가고 하지말자.
구름과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자.
마음을 활짝 여니 나는 한 폭의 수묵화가 되었다.
산과 계곡 나무 위에 내려앉았던 엷은 안개가 걷힌 하늘은 슬프리만큼 파랗다.
산이라는 대자연에 들어온 나는 늘 학생이다.
단순하게 느리게 자연이 주는 원리와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자.
산길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오름길에 둥근털제비꽃이 가냘픈 몸집으로 피어있다.
잎은 달걀 모양의 심장형으로 가장자리에는 둔한 톱니가 보이며 연한 자줏빛이다.
감기나 기침 부인병 등에 약용으로 쓰이기도 하며, 제비꽃은 20여 종이 넘어 매우 다양하다.
한 시간여 만에 진달래 축제를 열었던 봉우재 사거리에 도착한다.
축제장 천막은 철거되지 않아 흉한 모습이고, 재(고개)는 현(峴), 령(嶺)과 같은 말이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새파람이 몸에 부딪친다.
새파람은 동풍이다.
새가 동쪽을 가리키기 때문인데, 제주도에서는 샛바름, 농가에서는 '동부새'라 한다.
서풍은 '하늬바람' '갈바람'이라 하는데, 전라도나 충청도에선 늦바람이라고 하며,
강원도, 경상도에선 '북새'라고 한다.
남풍은 '마파람'이나 '앞바람'이라 하고, 북풍은 '된바람'이나 '뒷바람'이라 한다.
조금 더 자세히 구분하면 동남풍은 '된마바람' 또는 '새마바람',서남풍은 '갈마바람'
동북풍은 '높새바람', 서북풍은 '높하늬바람'이다.
바람은 그 세기에 따라서,
약하게 솔솔 부는 바람은 '가는바람' '솔바람'이고
아주 약하게 부는 바람은 '실바람'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는 '날바람',
눈꽃을 날리며 잔잔히 부는 '눈꽃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이 있다.
이밖에도
첫가을에 동쪽에서 불어오는 센 '강쇠바람',
살을 에일듯한 겨울의 센 '매운바람' '모진바람',
거세고 세찬 '거친바람',
독하게 부는 '고추바람',
채찍질을 하듯 간간히 세차게 후려치는 '채찍바람'도 있고,
바람의 형태에 따라
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큰바람, 노대바람, 싹슬바람, 솔솔바람, 용수바람, 회오리바람,
황사바람, 짠바람, 강바람, 마파람, 골바람, 입으로 소리를 내는 '휘파람'등이 있다.
오른쪽 시루봉쪽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시루봉에 불이 붙었다.
진홍색 진달래 밭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중턱에서 정상까지 약 15만 평에 30~40년생 진달래꽃이 뒤덮여 불타오르듯 장관을 이룬다.
볼일이 있어 잠시 주춤한 사이 문성, 종승은 시루봉 쪽 진달래 밭으로 사라진다.
작은 키에서부터 우리 키를 훌쩍 넘는 진달래꽃 터널이다.
내리뻗은 능선 일대도 진홍빛 꽃으로 뒤덮었다.
이산의 주인은 하늘과 바람과 진달래와 새들이다.
까악 까악! 하며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새들이 깨어나는 시간 바람이 나뭇가지를 툭하며 친다.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쉽게 지나치기 싫어 올라가며 자꾸만 뒤돌아본다.
우이봉의 기묘한 모습이 장관이다.
자연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나 자신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살아서 산의 전부가 되고, 죽어서 산의 일부가 될까.
산에만 들어오면 이렇게 편하니 모를 일이다.
사진촬영을 하며 된비알을 오른다.
기묘한 암봉을 지나 진달래 터널을 들어가니 계단 위 암벽 양옆에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이다.
건너편 도솔암쪽으로 엷은 안개가 걸치고,
살짝 와 두드리는 새파람과 흰 구름에 잠시 마음을 빼앗긴다.
암벽에 핀 자그마한 진달래가 눈길을 끈다.
저 작은 체구로 단단한 암벽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자연의 신비로운 생명력에 경탄할 뿐이다.
기묘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시루봉이다.
전국의 산중 '시루봉'이란 이름이 꽤나 많으며 대개는 시루를 엎어놓은 듯 펑퍼짐한 모양인데,
이곳 시루봉은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
임진왜란 당시 우국충정으로 목숨을 바친 승군들의 기개가 서린 모양이다.
한 가닥 밧줄에 매달려 세미 클라이밍을 하며 시루봉을 내려선다.
이어지는 진달래꽃밭에 종승이가 저만큼 앞서간다.
암봉을 거쳐 간신히 올라서니 긴 세월 누가 쌓았는지 영취산 정상(439m)에
돌탑 20여 개가 서있다.
이 산의 최고 정상은 도솔암을 지닌 진례산 510봉인데,
진달래꽃에 홀려 올랐더니 반대 방향의 영취산 439봉으로 올랐다.
기묘한 바위와 어울리며 진달래가 피어나니 한결 더 멋스럽다.
문성이 "진달래꽃 속에 30분이라도 앉아있자' 하니,
종승이 "30분 앉는다고 진달래꽃이 되냐?" 하며 맞받아치는 말이 우스워 한참이나 크게 웃는다.
도솔암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으나 호랑산 방향으로 가다 흥국사로 내려가기로 한다.
이어지는 암봉을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 몸으로 간신히 올라서며 식은땀을 흘린다.
한 가닥 밧줄도 없이 발은 디딜 데를 찾지 못하고 허둥대며, 손과 팔로만 육중한 체구를
끌어 올리다 머리도 살짝 부딪치고 숨이 가쁘기만 하다.
지난해 북한산 포대능선에서 내 앞에 올라가던 여성 한 사람이 바위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다.
뒤 따라가던 내가 빠르게 부축하며 배낭에서 스프레이 파스를 꺼내려니 이 여자가 큰소리를
친다. ~"어딜 건드리냐고"~도와주려다 면박을 당하니 무안하기만 하다.
피가 나는걸 보면서도 더 이상 구호조치를 못하고 나의 갈 길을 간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구조헬기가 빙빙 돌며 조금 전 사고가 난 그여자를 구출한다.
아마 뇌진탕까지 온 모양인데 도와주려는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고 무시하니 죄를 받았나보다.
개비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제주 한라산에서는 많이 보았는데 내륙지방에선 처음 본다.
4월에 꽃이 피며 열매는 타원형으로 다음해 8~9월에 붉은빛으로 익는 특징이 있다.
썩은 참나무 등걸에 운지버섯이 곱게 피어있고,
흥국사의 전경과 여천NCC 공장, 호남석유화학공장에서 나오는 흰 연기를 조망한다.
전국 최고라 할 수 있는 영취산의 명품 진달래 밭은 공해 물질이 배출되는 공단 바로 옆이고,
주위 환경이 좋지 않은 고작 510m에 불과한 산인데 산중턱 곳곳이 진홍빛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간식과 물 한 모금으로 허기를 달랜다.
초콜릿과 양갱 등 행동 간식은 산행을 하며 수시로 먹어야 힘이 난다는데,
내리막에 먹으니 순서가 바뀐 것 같다.
조릿대 사이로 눈 녹은 맑은 물이 흐른다.
흥국사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에 이르는 길가의 벚나무들이 흰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3시간 여 영취산 산행을 마치고 순천 송광사로 발길을 돌린다.
2010. 4. 8. 불타는 영취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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