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921 점점 늘어나는 공간

김흥만 2025. 8. 30. 20:00

2025.  8.  30.  11;00

할아버지~~!

주말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사내놈 둘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내 품에 안긴다.

 

정확히 표현하면 나에게 안기는 게 아니라

내가 손주들 품에 안기는 거다.

 

불과 두세 달 전에는 내가 조금 더 컸는데

이젠 두 녀석이 174cm인 내 키를 훌쩍

넘었고, 이 추세대로 큰다면 연말쯤 180cm가

넘어 내가 올려다볼 수도 있겠다.

 

한바탕 북새통을 피우다 돌아갔고,

이 녀석들이 왔다 갈 때마다 내 서가에 꼽힌

책이 서너 권씩 사라진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벌레였다.

두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침실, 화장실, 식탁에서도 내 눈은

책을 향했기에 "책하고 결혼했느냐"라고

아내로부터 무수한 잔소리를 들었다.

 

내 독서 스타일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정독(精讀)과 숙독(熟讀)보다는 조금 빨리

읽는 속독(速讀)이었으며 다독(多讀)을 했다.

 

그때의 다독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었던

자료가 글을 쓸 때마다 서서히 튀어나온다.

 

문학, 추리소설, 밀리터리 소설, 인문, 지리,

천문, 역사, 수필, 무협소설, 만화책 등 장르

(genre)를 가리지 않았으며 손에 책만 들고

있으면 행복했다.

 

배고팠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만화책을 수십

권씩 쌓아놓고 읽었는데 부모님과 형들은 나의

만화책 보는 시간표를 존중했고 특별한 제재를

하지 않았다.

 

우연인지 그게 인연이 되었는지 1967년 서울에

유학을 와 전세로 얻은 금호동 산꼭대기 자취방

집주인이 당시 유명했던 '황정희' 만화작가'였다.

                      <   2년 전 베트남에서   >

 

아들이 분가하기 전에는 서재를 아내와 같이

썼지만 분가 후에는 서로 다른 방을 서재로

쓰기에 서재는 나만의 자유로운 공간이자

사유(思惟)의 천국이다.

 

은퇴 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만(萬) 권의

책을 읽고 싶었다.

시립 도서관에 자주 들렸고, 수시로 서점에

들려 책을 구입하다 보니 꽤 많은 책을 소장

하게 되었다. 

 

이 또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지 어느 날

시작된 '황반변성'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황반변성은 책과 산(山)에서 혹사당한 내

눈을 쉬게 만들었고, 서가의 책은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서가는 손주들에 의해 책이 빠져

 공간이 생겼고, 그 공간을 일부로 채우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서가의 빈 공간을 볼 때마다 서운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마음속은 꽉 차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읽고 얻었던 지식이 손주들한테

자연스럽게 대물림이 되니 말이다.

 

이제 서재의 책은 내 것이 아닌 손주들 것이다.

나는 채우지 않고 남기지 않고 비워야 하는

황혼세대에 걸맞게 충실하면 된다.

 

서가에 책이 빠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정적명상으로 그 사고(思考)의 공간을 메우려

멍 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2025.  8.  30.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