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18. 08;00
골목길에 된바람이 불자 중학생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교문 안으로 들어간다.
수북하게 떨어진 노란 은행나무잎,
나무에서 붉게 타다가 떨어진 단풍잎은
땅바닥에서 나뒹굴면서도 붉게 타오른다.
다른 나무들은 일제히 떨켜층을 가동하고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자 황소바람에
내 몸이 마구 흔들린다.
참 메마른 바람이다.
가로수, 조경수들은 몇 장 남지 않은 잎을
보호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세상은 점점
메말라간다.
영하 4도까지 떨어진 아침 기온,
짧디 짧은 가을이 사라지고 겨울이 왔다.
4거리엔 등교하는 학생, 교통 수신호를 하는
경찰관,
건널목에는 노란 조끼를 입고 깃발 신호를
보내는 노인들이 부산스럽다.
몇몇 단풍나무를 제외하곤 웬만한 나무들의
이파리는 제대로 단풍이 들기 전 미리 말라
비틀어지고 떨어졌으니 가을이 단풍의
계절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봄바람은 산 넘어 남촌에서 훈훈한 기운을
담아 보내오고,
여름엔 남쪽에서 물기가 많은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며 가을엔 주로 서쪽에서 메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휘이이~" 거리며 괴상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몸을 떨게 하는 바람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황소바람인 모양이다.

< 하늘바라기 >
바람은 영어로 Breeze(산들바람), Gale
(강풍), Gust(돌풍), Storm(폭풍), Whir
wind(회오리바람)등으로 구분하여 표기
하지만 웬만하면 다 wind로 통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비와 바람, 구름 하나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걸맞는 이름을
지었다.
봄, 여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을
'마파람'이라 했으며,
가을에는 '하늬바람에 곡식이 모질어진다'
라며 맑은 날 서쪽에서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하늬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옛날 뱃사람들은
동쪽을 '새', 서쪽을 '하늬', 남쪽을 '마',
북쪽을 '노'라고 했다.
그래서 동풍은 '샛바람', 서풍은 '하늬바람',
남풍은 '마파람', 북풍은 '높바람(된바람)'이
라고 불렀으며,
북동풍은 높새바람, 북서풍은 높하늬바람,
동남풍은 된바람, 남서풍은 늦하늬바람이
라고 이름을 지었다.
또한 바람의 속도와 강도에 따라,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
바람, 된바람, 센바람, 큰바람, 큰 센바람,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으로 표현을
했다.

< 나비바늘꽃 >
양지 바른 곳에서 뒤늦게 핀 '가우라꽃'과
'하늘바라기'를 만났다.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가우라꽃,
흰나비가 춤을 추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백접초(白蝶草)로도 불리는 '나비바늘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자는 봄바람에 유혹을 느끼고,
남자는 가을바람이 불면 외롭고 쓸쓸해
진다고 했다.
그래서 가을바람을 소슬(簫瑟)바람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의 전통악기인 퉁소나 거문고는 쓸쓸한
느낌을 주는 악기임이 분명하다.
이참에 바람에 관련된 노래나 들어야겠다.
"나를 떠난 사람들과~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을 음유(吟遊)하는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전유진의 '숨어우는 바람소리'와 '갈바람',
정다경의 '하늬바람', 정서주의 '바람 바람아'
박강수의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을 이어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가을이 떠나가려 하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북망산천(北邙山川)으로 떠나간 친구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감정은 기억의 결과이다.
그 기억을 오래 감당하면 사랑의 추억이
남는다는 방정식에 참 오랫동안 길들여졌지.
한참을 망각(忘覺)의 세월 속에 살았다.
사랑이란 지워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
된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잊는다는 것, 잊어진다는 것, 외롭다는 것,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이란 남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제 겨울이 왔다.
삭풍(朔風), 설풍(雪風), 설한풍(雪寒風),
고추바람, 된바람, 칼바람, 매운바람, 손돌
바람, 채찍바람을 맞으며 숨 죽이고 한세월을
보낼 일만 남았구나.
2025. 11. 1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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