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0. 04;00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려 늘어지게 잠을
자려했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머리가 점점 맑아져
잠이 오지 않으니 이 또한 노인지반(老人
之反)이 아닌가.
오늘도 '운동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황산숲길을 걷는다.
지난주 8일 시청 강당에서 알바 면접이
있었다.
일이 어떠냐고 면접관이 묻기에 딱히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재미있다"라고 답변을
했다.
은퇴하고 산과 당구장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5년 전 길가에 걸린 일자리
현수막을 보고 지원을 했고, 다문화센터에서
일을 한 지 5년이 훌쩍 지나갔다.
새벽운동과 식사 후 정해진 장소로 출근하는
발걸음이 너무 가볍고 좋았기 때문에 '재미
있다'라고 답을 한 거다.
아버지께서는 "사내놈은 밥 먹으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하셨다.
따라서 은퇴 후에도 집에 붙어있지 못하고
명분을 만들어 밖으로 나돈 지 10여 년만에
소일거리가 생겼고,
어느새 5년이 지나며 6번째 면접을 보았고
어제 합격 통보를 받았다.
현역시절에도 사무실에 빨리 출근하려 안달
을 떨었고, 지점장이 되어서도 다른 직원들
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는 거는 기본이었다.
이 나이에 갈 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알바 생활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했는지
한 시간 정도 일찍 나가야 마음이 편하다.

중독이라는 말이 다 나쁘지는 않다.
알코올중독, 니코틴중독, 마약중독 등은
나쁜 의미로 쓰이지만 운동 중독증과
일 중독증은 거부감이 별로 없다.
처음 알바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는 굉장히
어색했었다.
이 나이에 일을 왜 할까,
무슨 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번아웃(burnout) 직전까지 갔었으니
지점장 시절 쌓였던 권위와 흔적을 다
지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며칠 후부터 내가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녀간 후 어질러진
책을 정리하고, 치우고 버리는 일에 점점
익숙해졌다.
지인들은 나보고 신기하다고 한다.
첫째는 넥타이 정장이 잘 어울리고 늘
지시를 하는 모습만 봐왔고,
은퇴 후에는 산과 여행을 즐기고 도서관
에서 독서나 하며 품위 있게 시간을 보낼 줄
알았기에 알바로 허드렛일을 한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는 거다.
둘째는 당구장 출입을 믿지 않았다.
마비된 팔의 트라우마와 담배연기 냄새를
싫어해 나는 평생 당구장 출입을 안 할 줄
알았다며 지금처럼 매일 당구를 즐기는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고한다.
물론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과 들판에서
노는 학(鶴)처럼 사는 한운야학(閑雲野鶴)
도 좋다.
나는 가끔 '하는 것'과 '하지 않음'을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의 짧은 인생에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닌가.
당구 덕분에 마비되었던 팔도 많이 풀렸고,
집에서 청소와 쓰레기 처리, 세탁물 정리
등을 하듯이 사무실에서 강의실 배치 등
여러 일이 익숙해졌다.
그러고 보니 당구장출입을 하루만 빼먹어도
이상하니 운동 중독증과 일 중독증에 이어
당구장 출입도 중독이 된 모양이다.
이제는 글 쓰는 것도 중독이 되었다.
컴퓨터를 켜면 무언가 쓰고 싶고, 써야만
직성이 풀린다.
일단 글제를 정하면 서너 시간 이상 정신
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기에 졸필이나마
느림의 미학으로 949편이나 쓰게 되었고,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 블로그 방문자도
15만 명이 넘었다.
예전엔 백화점이나 마트에 마지못해 끌려
다녔다.
지금은 장보기도 신이 나 잘 따라다니고
내가 필요한 물품은 언제든 인터넷으로
능숙하게 구입을 한다.
인생팔고(人生八苦)인 생로병사(生老病死)
중에서 우리의 현재 위치는 생(生)과 사(死)
의 가운데인 노병(老病)에 해당한다.
따라서 늙고 아픔에서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진정한 치유는 무엇일까.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한다는 것,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좋은 일 궂은일 따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좋다.
어차피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과 책임지는
일은 남자의 몫이고 숙명(宿命)이 아닌가.
2025. 12. 20.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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