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956 담쟁이의 수난

김흥만 2026. 1. 25. 16:25

2026.  1.  23.  08;00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강추위가 열흘

이상 연속이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다.

예봉산에서 몰려오는 북풍한설에 몸이 오싹

할 정도로 한기를 느낀다.

 

지상의 온도가 지금 영하 12도이다.

여긴 지열도 없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100

m당 0.65도 정도가 더 떨어진다는 이론에

의하면 영하 13도 이하로 떨어졌겠다.

 

담쟁이가 앙상한 줄기만 남아 바람에 

흔들리며 오들오들 떤다.

 

작년 봄 베란다 건너편 신천지 교인들의

간섭이 싫어 담쟁이 네 그루를 심어 시선을

차단하려 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원예종 담쟁이는 기를

펴지 못했다.

황산숲에서 캐다 심은 담쟁이는 야생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금세 화분을

휘감더니 담벼락을 타고 올랐다.

 

지난 8월 22일 베란다에 나갔다가

줄기만 남은 담쟁이를 보고 깜짝 놀랐지.

 

잎을 다 갉아먹어 배가 남산만 하게 부푼

맹충이 두 마리를 발견했고,

화를 참지 못해 비닐봉지에 넣어 매립용

쓰레기에 던졌으니 사실상 죽인 거다.

 

2005년 머리 수술을 하고 살생이 싫어져

TV프로에서 짐승을 잡는 장면이 나오면

전원을 끄던지 다른 채널로 돌렸다.

 

수십 년 동안 좋아했던 낚시도 끊었고,

산야에 지천으로 자라는 풀 한 포기, 

꽃 한송이를 꺾지 않으려 했고,

벌레 한 마리라도 밟을까, 필요 없는 살생을

하지 않으려 많이 조심하였다.

 

그랬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담쟁이 잎사귀를 몽땅 갉아먹은 맹충이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원래부터 농담을 잘하고 장난꾸러기로 살아

왔어도 벌레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의 잔인한

심장을 갖지 못했는데 그날은 왜 그랬을까.

 

그날 이후 '고수'를 심은 화분에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어도 모른 체 놔두었고,

길을 잃은 귀뚜라미 한 마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책상과 벽을 오가며 방황

하기에 살짝 잡아 밖의 화분에 올려주었다.

 

잎을 몽땅 잃었어도 담쟁이는 새로운 잎을

탄생시키고 넝쿨은 다시 벽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맹충이에게 수난을 당했어도 매일매일

얼마나 더 높이 올랐을까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었는데,

 

11월 어느 날 주말마다 나와 합창연습을

하던 어느 악동(惡童)이 벽에서 담쟁이

넝쿨을 몽땅 뜯어냈으니 두 번째 수난을

당한 셈인가.

 

그 덕분에 단풍 든 담쟁이 잎을 보지 못한

겨울이 닥쳤고 뿌리가 얼을까 물을 주지

못했다.

 

물론 누가 그랬는지 CC TV를 돌리면 금세

밝혀지겠지만 장난꾸러기 어린이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시방 모진 바람이 불어도,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강추위가 계속

되어도 입춘이 불과 열흘 이내로 다가왔다.

 

담쟁이는 대단한 생명력을 가졌으니 겨울의 

힘든 시련을 이겨내고 새싹을 틔우겠지.

 

새봄이 오면 싹이 트고 꽃이 피면 벌레들도

다시 돌아온다.

이젠 징그러운 벌레를 만나도 분노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방생(放生)을 하리라.

 

               2026.  1.  23.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