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8. 12;00
강동역 1번 출구 작은 소공원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 서있고,
동상 앞에 한겨울에도 빨간 열매를 자랑
하는 나무가 있다.
신선이 먹는 식품으로 잎을 쌀에 섞어
먹으면 백발이 검어지고 노인이 젊어
진다는 성죽(聖竹)나무와 천(天)까지는
기억하는데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십여분 후 '남천(南天)나무' 열매가
생각났다.
그동안 웬만한 건 리얼타임(real time)
으로 생각났었는데 많이 당황했다.
내 머릿속 기억 저장창고에 문제가
발생한 건가.
건망증 단계를 넘었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 지나가는 차량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면서 차량 번호를
외워봤다.
현역시절에는 짧은 시간에 차량 번호
20여 대 가량이 암기가 되었고,
고객의 이름이나 차량번호는 한 번만
보고 들어도 금세 기억이 되었다.
최근에도 10여 대 정도는 거뜬하게
입력이 되었는데 오늘은 겨우 5대만
생각이 난다.

< 남천나무 열매 >
동상 뒤 삼성빌딩을 올려다 보며 높이가
얼마나 될까 궁리를 하다가 '피타고라스
의 345법칙'이 갑자기 떠올랐다.
수십 년 전 학생 때 배운 피타고라스의
정리인 밑변의 제곱+높이의 제곱=
빗변의 제곱, 즉 a² + b² = c²라는 등식은
생각나고,
최근에 본 식물의 생각은 나지 않으니
나도 문해피사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노인지반(老人之反)을 피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황혼의 시간은 어쩔 수 없다.
암기력이 예전 같지 않음은 늙어가는
과정이 분명하기에 받아들여야겠지.
나는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에 책을
인생의 스승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이젠 황반변성으로 책을 읽지 못하니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축적되었던 것을
조금씩 꺼내 썼다.
내가 원하던 생각이 바로 떠오르고,
사유(思惟)의 창고 속에 저장되었던
지식도 생각나고, 때로는 삶의 정답도
나왔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도 늘 내편인 줄
알았다.
정년퇴직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고,
늙음도 오지 않을 줄 알았으니 얼마나
심한 착각 속에 살았던가.
이젠 내 사유의 창고인 머릿속이 꽉 찬
모양인지 과부하(過負荷)로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가지런하게 꽂혀있던 책들도 손주
녀석들이 다녀갈 때마다 서너 권씩
빼가는 바람에 서가도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것처럼 휑해져 간다.
며칠 전 친구가 접이식 지휘봉을 건네
주기에 얼른 받았다.
내가 강의할 일은 없고 아내에게 사진
강의를 할 때 쓰라고 주었더니 요즘은
파워포인트로 하기에 쓸 일이 없다고
한다.
머릿속은 물론 사물도 비워야 할 때가
되었다.
친구들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집 장식장에 곱게 간직했던 양주병을
들고 나타난다.
나는 무엇을 비우며 미니멀 라이프
(minimal life)를 실천할까.
이마트 할인 행사 때 사두었던 모자가
몇 개 있으니 필요한 친구들에게 주어야
겠다.
동사무소나 교회 바자회에 보내려
세탁한 겨울옷도 옷장에 다 넣지 않고
별도로 모아놨다.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새벽부터 내리던 봄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에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내려온다.
담장밑에 손톱보다 작게 핀 개불알꽃이
전부 오므렸다.
태양빛이 사라지자 잠을 잘 모양이다.
2026. 3. 1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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