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12.
휴일 오후,
인터넷 쇼핑몰에 주문한 자전거가 도착
했고 물건이 또 하나 늘어났다.
실내 운동용 자전거를 조립하고 거실
정리를 마친 아들과 손주 녀석들이
돌아가자 집안은 적막강산으로 변하고,
자전거에 올라타고 페달을 돌리니
금세 내 얼굴에 빨간 홍조가 생긴다.
이번 겨울을 나면서 체중이 무려 5kg
이상 늘어났다고 체중계가 비명을
지른다.
수년간 80kg으로 유지가 되던 체중이
4월 초 85.3kg으로 늘었고,
혈당수치는 물론 간수치까지 오르는
비상상황이 된 거다.

근육충돌로 팔의 통증이 심해 다니던
헬스장을 끊고 꾸준하게 걷기 운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input과 output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108배 운동을 하면 단기적인 효과가
있겠지만, 더 독하게 운동을 하기 위해
실내용 자전거를 장만했다.
운동을 마친 후 청소기를 돌리고 옷방
으로 들어가 꽃샘추위로 아직 정리하지
않은 옷장과 수납장을 정리한다.
행거(hanger)에서 오래된 옷을 걷어
내고 수년간 입지 않은 옷을 꺼낸다.
현역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물건을
여기저기 수납장에 넣어두고 쓰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백수가 된 후에는 틈틈이 정리를 했고,
지난주에 10kg 정도를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뜻밖에 100 사이즈 옷이
나왔다.
지금 110 사이즈 옷을 입는데 은퇴할
무렵 입었던 100 사이즈 옷이라니.
매일 출근하기 전 조깅과 주말 등산으로
몸무게가 76kg이었고 똥배가 나오지
않았을 때 입었던 옷을 꺼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아마도 체중이 빠지면 입으려고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모양이다.
전쟁통에 태어났고 보릿고개 시절을
경험한 우리 세대는 근검절약과 저축이
몸에 배었기에 옷이나 물건은 신중하게
샀고 한번 사면 웬만해선 버리지 않았다.
물건을 잘 사지 않고 웬만하면 고쳐서
쓰던 습관이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인터넷 쇼핑몰과 TV 홈쇼핑에서 쉽게
물건을 사게 되었고 물건들이 많이
늘어 난 거다.
다른 수납장에도 한동안 입지 않았던
옷이 마치 군대 관물함같이 오(伍)와
열(列)이 잘 맞춰져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자질구레한
물건에 휘둘리고 구속을 받는데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다.
잘 버리지 않으면 시간도둑과 공간도둑
에게 휘둘리는데 말이다.
거창하게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미련 없이 버리면 간단하다.
즉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은 물론,
적게 가짐으로써 삶의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것을 간과
했다.
이번엔 24년 전 은행 합병기념 체육
대회 당시 동대문 운동장에서 입었던
점퍼를 꺼내며 잠시 손을 멈춘다.
이 옷을 남겨둔다고 해서 예전 직위를
다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여태
버리지 않았으니 버린다는 게 참 어렵
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물건을 비운다는 과정은 예전의 나와
결별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은행 신분증과 배지, 지점장 때 결재를
했던 상아 도장은 아직도 설합 속에
있다.

2008년 머리수술의 trauma에서 헤어
나지 못하였을 때 정년퇴직은 다가왔고,
재취업이나 임금 피크제 등 목표가 있는
삶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냥 산이나 다니며 웬만한 건 다
버리고, 단순하고 느리게 살고 싶었다.
이제부터라도 과거의 시간을 멈추기
위해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기준부터
바꿔야겠다.
여태껏 버리지 않았던 옷이나 물건들이
나에게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져본다.
혹시 나중에 체중이 빠지면 입을 수 있는
옷과 일이 생기면 입게 될 정장과 구두,
넥타이,
특별한 날을 위해 간직했던 파커 만년필
까지 간직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의 쓸모를 핑계로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주기로 마음을 먹자 버버리
코트 등 금세 20kg 정도의 옷이 나왔다.
묵은 옷을 빼고 나니 옷장과 수납장에
감춰져 있던 공간이 드러나고 마음도
편해졌다.
물건을 비운만큼 나의 과거도 서서히
제 위치를 찾아갔다.
지난날은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할 대상
이지 결코 기대거나 의지할 대상은 아니
라는 생각이 들면서 과거의 미몽(迷夢)
에서 벗어난 거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버린 건 물건과
함께 물건에 붙잡혀 있던 내가 아닐까.
물건을 버리니 잡다한 생각도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휴일의 옷장정리는 이렇게 마음의
정리로 끝이 났다.
2026. 4. 12.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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