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158 나의 헤진 운동화와 그리운 아버지

김흥만 2017. 3. 25. 10:57


2012.  8.  13.  05;00

미사리 산책길의 반환점인 4.5km를 돌아서는 순간 신발바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작년 11월 '해남 두륜산' 하산 길에서도 등산화 뒤창이 벌어져 곤란했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운동화 밑창이 벌어졌다.

 

하긴 꽤 오래도 신었다.

운동화 세 켤레를 교대로 신다보니 세월의 순서대로 맛이 간다.

 

소학(小學)에서

"나이는 시간과 함께 달려가고, 뜻은 세월과 더불어 사라져 간다."라고 하는데,

운동화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는구나.

 

6살에 상산국민(초등)학교 입학을 하며,

깔끔한 어머니 덕분에 첫날부터 교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었다.

당시엔 대부분이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흰 고무신은 거의 신지 못했으며

운동화는 전교에서 몇 명 정도만 신을 정도였지.

 

일주일에 두 번은 운동장에서 강냉이 죽과 딱딱하게 굳은 우유가루를 배급받고,

미군들이 차에서 던져주는 축구공, 초콜릿 등이 매우 귀중한 선물이 되는 시대였지.

 

검정 고무신은 보기 싫다며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사서 내 발에 신켜 주었고

등 뒤엔 가죽가방을 멘 제법 멋쟁이 초등학생이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기와지붕 집에 살며, 전기는 밤 12시 통행금지 사이렌과

동시에 꺼지는 일반선이 아니고, 24시간 들어오는 특선을 사용했지.

 

귀한 일본제 '내셔널 전축'과 '유성기'가 있어서, 당시에 유행하던 짝사랑, 낙동강처녀,

신라의 달밤, 전선야곡, 오동추야 등을 어렸을 때부터 배워 불렀으니

요즘 이야기하는 속칭 '부르주아' 계급이다.

 

진천은 내륙지방이고,

당시에만 해도 서울행 버스가 하루에 고작 2대밖에 없는 오지 중 오지였다.

명절이나 되어야 쇠고기, 돼지고기 맛을 보고,

생선은 조기, 동태. 썩어서 창자가 튀어나온 꽁치, 소금에 푹 잠겨 있는 자반고등어,

새우젓 등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전부이다.

 

아버지는 읍내에서 방앗간과 과자공장을 하시다가,

내가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 돌 무렵 공장의 창문이 떨어져, 셋째인 내가 깔려 죽을 뻔

했다며 과감하게 공장을 처분하고 이사를 한 후,

진천 엽연초생산조합에서 공직의 길을 걷게 되며 아버지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

 

보릿고개 시절 봉급이라도 나오니 여러 자식들을 가르치고 기르셨다.

지금 웬만한 도시에선 영화 개봉관이 즐비하지만, 당시에는 학교운동장과 천주교회

마당에서 보여주는 공짜영화가 전부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니 9살이던가?

7남매 중 6번이 태어나고 7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주교마당에서 흰 고무신을 깔고 앉아 '10계'인가, '벤허'인지 공짜영화를 보다가

잠이 든다.

언제 끝났는지 사람들은 다 가고, 깔고 앉았던 흰 고무신이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맨발로 집에 간 나는 어머니한테 혼나다가

공부는 안하고 영화 보러가 아까운 신발 잃어버렸다며 빗자루로 얻어맞는다.

 

그 후 흰 고무신이 검정 고무신으로 바뀌며 흰 고무신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내내

남는다.

 

어느날 한잔 술에 불콰한 얼굴의 아버지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워 신발가게로 가서

검은색 계통의 운동화를 사주시는데 어머니한테 맞는걸 보시며 가슴이 아프셨던

모양이다.

 

밤새 운동화를 꼭 껴안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며 아껴 신겠다고 다짐을 한다.

남들 공찰 때 나무 밑에 앉아 있고, 비 오는 날에는 가방에 넣고 아예 맨발로 다닌다.

 

꾸부정한 어깨로 딸딸거리는 자전거를 애용하시던 아버지,

술을 좋아하셔서 취하면 자전거 대리운전은 내가 도맡아 했지.

 

아버지는 일본 강점기 시대 전 일본 서예대회에서 장원을 한 명필로

보통학교 5년 중 2년을 월반하여 3년 만에 졸업한 수재라는 명성이 항상 따라 다녔지.

 

항상 엄하였지만 사랑방에서 친한 친구들이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소년같이 붉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막걸릿잔을 기울이던 아버지.

 

군입대 후 전방에서 근무하다 첫 휴가에서 별일 없느냐는 말씀에

"다 괜찮은데 인삼밭이 좀" 귀대 후 인삼밭이 지뢰밭이라는 첫째 형님의 설명에

몇날며칠 식음을 전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울컥해 난 한줄기 눈물을 흘렸지.

 

은퇴 후 과수원에서 기거하시며 술과 친구를 사랑하다가

술이 원인인지 농약이 원인인지 간경화를 이유로 63세의 나이에 아까운 재주를 두고

영면(永眠)하신다.

 

항상 허허대며 웃기만 하셨던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았는데,

힘든 외로움 속에 일곱 자식을 기르며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엔 절반이 눈물이었을까,

아님 전부가 눈물이었을까?

                  

 [               헤진 운동화

 

          운동화가

          입을 벌리네.

          10년을 사랑했다며

          나를 떠나려 하네.

 

          천주교 마당 공짜영화

          흰 고무신짝

          깔고 앉았다 잃어버려

          엄니한테 빗자루로 얻어 맞았지.

 

          아버지 내 손 잡고

          사주신 운동화

          누가 훔처 갈세라

          밤새 꼬옥 껴안고 잠드네.

 

          친구들 시샘 속에

          흙 묻을까 찢어질까

          조심조심 아껴 신고

 

          내 아들

          운동화 사주던 날,

          내 아버지 술 냄새 담배 냄새

          그리웠소.

 

          10년 동안

          날 사랑해준

          운동화가

          이젠 날 떠나려 하네.                    석천       ]

 

아 그리운 아버지!!


다 헤진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흘러간 옛날을 회상하니, 문득 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그리움이 배어 나온다.

 


                               2012.   8.   13  한강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