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185 바람과 구름과 비 평창<거문산 1,175m~금당산 1,173.2m>

김흥만 2017. 3. 25. 20:07


2012.  5.  17 06;00

살다 보면 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지.

밖에 열이가 심장수술에 이어 대장암수술까지 했다는 안 좋은 소식이 들어와

잠깐 병원에 들려본다.


긴 백수생활에 지쳐 매너리즘에 빠졌는지 한동안 기억 속에 담지 않아

광명을 떠난 후 자주 안부를 묻지 못했다.

 

사실 자주 안부를 묻는다는 게 이 빡빡한 세상에선 아름다운 일임을 알고는 있지만,

나 역시 잊어지고 있는 삶을 살다 보니 쉽지는 않다.

 

나 또한 유약한 인간이라 수년간 수없이 스러지는 친구들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잔상을 지우지 못해 한참이나 마음고생을 한다.

문병이라도 다녀오면 한동안 잔영을 떨치기가 힘들고 어려워, 조금은 나도 무관심해지자고

잘못된 마음을 먹었었지.

 

어렵고 아프고 힘들 땐 안부를 묻고 찾아주는 게 사람의 도리이겠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일차 백일, 이차 돌, 삼차는 회갑을

전후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허우적대다가 벗어난다.

 

기억 저편으로 넘기기엔 너무 가슴이 아프다.

만남의 광장에 홀로 서서 검단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쾌유를 빌어본다.  

 

오늘이 벌써 5월 17일.

오월 중순을 지나니 며칠 후면 유월이 기웃거리겠구나.

문득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철쭉이 지니 이팝나무, 아까시나무가 동시에 활짝 피었다.

봄의 끝자락에 머물지 못하는 그리움을 달래려고, 기쁨을 주는 숲이 있는 산으로

내 마음과 몸은 달려간다. 

 

09;20

옛날 산중턱 기암절벽에 산삼 꽃의 그림자가 흐르는 계곡물에 비쳐, 수많은 심마니, 주민,

지관들이 합세하여 산삼 밭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해 늘 금당산(錦塘山)의 산삼을 잊지

못했다는 전설을 가진 '금당산'으로 들어선다.

 

바람과 비구름, 개울의 물소리가 전원 교향곡을 합주한다.

마을 길은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풍경이다.

 

서기 953년 창건되었다는 법장사를 뒤로 하고 거친 태생의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태고의 울창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봄 산행에서는 아무데나 밟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선종(禪宗)의 공안집(公案集)인 '벽암록'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나오지.

말 그대로 간각하(看脚下)라 '발밑을 살피고 일상을 바르게 하라'는 뜻인데,

함부로 밟다가 매서운 겨울의 고난을 이기고 나온 꽃을 밟을까 두렵다.

 

중국이 원산지인 콩과 자운영이 분홍색을 토해낸다.

 

산행길 들머리에서 만난 이 꽃은 태백제비꽃도 아니고 뭐지?

산자고는 줄기가 가늘고 콩제비꽃이라는데 자료가 없다.

 

산으로 가는 길은 물길을 옆에 두고 올라가는 길이다.


왼쪽에 20여m 정도 높이의 폭포소리가 요란하다.

거리가 멀어 하산길에 폭포를 찍으려 했으나 '재산재'로 내려서는 바람에 찍지 못해,

이 글을 쓰며 내내 아쉽기만 하다.

 

오름길에 수없이 서 있는 동박나무(생강나무)를 바라보며,

문득 정선 아리랑의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라는 가사가 생각나

흥얼거려본다.

 

        정선 아리랑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우나.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우리 댁에 서방님은 잘 났던지
       못 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 나무 지게 위에
       엽전 석 냥 걸머지고
       강릉, 삼척에 소금 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 구비 부디 잘 다녀오세요.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산길언덕 위를 오르며 구름사이로 삐지고 나온 햇빛 고운 산에 잠시 눈길을 준다.

이 산길을 오르면 내 그리움이 다 할까.

아까시향이 짙은 산언덕에 봄맞이꽃, 괴불주머니가 활짝 피었다.

 

          [       긴  세월

 

             근데 지금 어디를 가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니

             오늘도 방황을 하고 있구나.

 

             태어나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모르고

             그냥 이렇게 살다 죽는 걸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도 모르는

             삶이 되었으니 방황하는 삶일까.

 

             긴 세월이 흐르고서야

             가슴 속으로 난길 하나 바라보며

             그리움을 전한다.                                              석천  흥만   ]

 

고추나무에도 흰 꽃이 피었고, 괴불주머니 옆에 <대나물>도 피었다.

어린잎은 식용하고, 뿌리는 발열과 졸열 치료 등에 쓰인다.

 

아늑한 숲이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은 거칠다.

바람 따라 왔다가 바람 같이 사라지는 인생과 자연은 참 많이 닮았다.

 

잠시 잠잠하더니 비바람이 산을 뒤흔든다.

오르막길은 계속되고 숲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초록으로 변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 햇볕과 바람과 비는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을까.

하늘과 땅의 은밀한 대화에 나도 동참하려면 귀를 기울여야겠지.



빗줄기와 산안개는 순식간에 숲을 지워버린다.

산중턱에서 비를 맞으며 난 새로운 풍경을 만난다.


이 대자연의 숲 속에 서 있는 나는 찰나의 순간만 보는 우매한 인간일 뿐,

청설모 한 마리가 참나무 위를 바삐 날아간다.

나는 비와 안개를 타고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오른다.

 

아직 피지 않은 철쭉꽃나무 사이로 '진달래꽃' 한 송이가 보인다.

연한 분홍이니 '연달래'일까?

하얀 진달래는 '흰달래', 적당히 붉으면 '진달래', 색이 너무 진해 자줏빛이 나면

난초 빛 같다 해서 '난달래'라 부른다.

 

옛날엔 꽃 색깔을 아가씨의 젖꼭지 색깔에 비유해 철부지 소녀를 흰달래, 부끄럼 타는

사춘기 아가씨를 연달래, 한창 피어나는 아가씨를 진달래, 한창 때를 넘긴 노처녀를

난달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옛 선비들은 꽃의 외모보다 기품을 보고 구품(九品)의 품작을 내려 화품(花品)이라

했는데, 세종 때 학자 강희맹(姜希孟)은 홍진달래에 6품(六品)을 주고, 원래의 흰 색깔

그대로 변하지 않는 절개를 높이 사 흰진달래에게는 5품(五品)을 준다.

 

이 꽃이 메마른 땅에서 오로지 북향으로 피기 때문에 절신(節臣)의 임 향한 일편단심을

높이 샀다고 하는데,

그러면 '목련'은 항상 북쪽으로만 피는데도 품계가 없으니 차별을 받는 게 아닌가?

 

또한 지천으로 피는 철쭉도 흰색부터 분홍, 자줏빛까지 여러가지 색깔이 있는데

품계를 논하는 사람 없으니,

철쭉 만발한 산속에서 막걸리 한 사발하며, 봄 산의 흥취에 취해 이제부터는 내가 논해볼까? 

 

빗줄기는 굵어지고 안개는 점점 더 두꺼워진다.

나무도 길가의 돌멩이도 괄괄 거리며 흘러내리는 계곡물도 소나무 숲도 뿌옇게 숨어버렸다.

 

나는 안개에 갇혀 버린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편안하고 포근함을 느끼며 점점 더 깊이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10;50

90분 만에 거문산 정상(1175m)에 올라선다.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는 바람은 매서운 바람이 아니다.

 

거문산에서 금당산 2.1km의 능선 길은 바람 따라 이어진다.




능선길의 숲 속은 연둣빛을 흩뿌린다.

온갖 나무와 이름 모를 풀 한 포기까지 생명의 기운을 받았다.

 

금년 봄의 적당한 비, 햇살과 바람의 덕분일까?

숲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오직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생명이 다한 죽음은 삶으로 수렴되니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 죽어간 것들의 환생인 모양이다.

 

홀아비꽃대가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민다.

 

무수한 발걸음이 만들어 낸 추억과 낙엽이 쌓인 산길이다.

숲속의 능선 길에서 '마차산'에서 만난 '기차바위'와 비슷한 바위를 만난다.

 

능선 길은 바위지대를 우회하여 이어진다.

 

해발 1,100m에서 만난 넓은잎쥐오줌풀이 처연히 비를 맞고 있다.

꽃을 달여 먹으면 진통, 건위, 신경과민, 히스테리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이 인간보다 위에 있다.

 

          [   바람부는 능선 길에서

           

             바람과 함께 걷는다.

             바람에 묻어 걷는다.

             신록에 묻혀 걷는다.

 

             좁은 능선 길에서도

             마음은 넉넉해지고 넓어지니

             저 푸른 하늘 덕분일까.

             저 푸른 숲과 산봉우리의 덕분일까.      석천  흥만   ]

 

너무 가까이 서면 정상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뒤로는 수천 길 낭떠러지인 절벽 위 특별한 장소에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산은 높고 가야할 길은 멀다.



구름이 흘러내린다.

가까이 가면 보여주지 않으려는지 구름이 정상을 가리려고 빠른 속도로 달려든다. 

 

은방울꽃을 찍다 카메라를 놓친다.


고장이 났는지 렌즈가 들어가지 않고 셔터가 작동되지 않는다.

순간 당황하지만 침착하게 렌즈를 간신히 밀어 넣으니 다행히 작동이 된다. 

 

금당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400m,

정상오름길에 땅을 밟으면 '공당공당 금당금당'하는 소리가 난다는데,

난 작년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사각 사각대는 소리를 들으며 정상으로 올라선다.

 

시간은 흐른다.

구름도 흐른다.

바람도 흐른다.

천둥소리 요란하더니 바람이 기세를 올리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12;20

세 시간 만에 금당산 정상(1.173.2m)에 오른다.

 

1998년 오른 후 두 번째인가?

당시 이곳에 같이 올랐던 일행 중 한 명은 사업실패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산행 며칠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는 곳에 다시 오르니 새삼 흘러간

추억이 회상된다.

 

오대산에서 가리왕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남서로 뻗어 내리고,

이곳 금당산은 백석산과 대미산의 중간지점에 있다는데 비구름과 산안개 속에 갇혀

장대한 산군의 조망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이 가져야 할 양심을 버린 쓰레기가 많이 보인다.

 

13;30

어떻게 올랐냐가 아니라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중요하다.

천둥소리는 강해지고 빗방울도 점차 굵어진다.

금당사거리에서 네 명은 거문산으로 원점회귀하고, 나랑 경호 둘이는 '재산재'로 내려선다.



노란 피나물이 요염하게 비를 맞으며 피어있다.

뿌리를 찧어서 종기나 습진에 붙이며 '노랑매미꽃'이라고도 한다.

 

현재 고도 900m.  

광대수염이 흰색으로 2층, 심지어는 3층으로 피었다.

꿀이 많고 비뇨질환, 월경불순 등에 쓰인다고 한다. 

 

엷은 안개로 산 아래 풍경을 다 담지 못한다.

눈부신 초원의 빛 초록이 눈앞에만 일렁인다.

 

살짝 보이는 숲 사이로 누에가 기어가는 모습의 잠두산(蠶頭山)과 백석산이 보인다.

 

여기서 마을회관을 거쳐 차량이 통행하는 지방도까지는 2km를 더 걸어야 하고,

 

법장사~거문산~금당사거리~금당산~금당사거리~재산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가 약 8.4km

이지만 실제 10km가 넘는 산행거리에 네 시간 반이 걸려 하산을 한다.

 

15;00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풍광을 쳐다본다.

언제 저 능선을 다 걸었을까.

빗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합쳐 대형 오케스트라를 연주 한다.

 

농부들이 고추모종을 심는다.

마음을 쉬어가게 편안히 해주는 곳이라 한참을 바라본다.


멀리 한쪽 들판에는 황소 한 마리와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목가적인 풍경이 흐른다.

나 역시 시골에서 자라 더 애착이 가는 풍경인 모양이다.


19;00

 

              [   밤안개

 

                밤안개가 깊어간다.

                안타까운 사연을 감추려는가.

 

                샛별도 달도 다 감춰졌는데

                밤안개는 무엇을 잊으라할까.

                삶의 고통을 잊으라할까.

                삶의 고통이 가슴 속에 찼는데

                어떻게 잊으라할까.

 

                어차피 잊어진 사람이 되고

                잊어지고 있는데

                자그마한 연의 꼬리라도 잡고 싶은 걸까.

                밤안개 속에 묻어지는 울창한 숲을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석천  흥만  ]

 

20;00

가로등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온다.

추한 세상과 아름다운 세상을 감춰주는 밤이 밀려오고 나는 어둠으로 빨려든다.


나의 존재는 어둠의 일부가 되어 없어지고,

나는 유령의 존재가 되어 밤의 세상을 헤맨다.

 

                          2012.  5.  17  거문산~금당산을 종주하고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