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18 버킷 리스트에서 <지리산 1,915m>을 지우다.

김흥만 2017. 3. 27. 12:12


2016.  11.  24.

풍성하던 노란은행잎도, 붉게 타오르던 단풍잎도 떨어져 바짝 마른 낙엽이 되었다.

찬바람이 강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니 사람도 풍경도 다 같이 건조해진다.


한 해의 끝자락이라는 허무감, 또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아쉬움을 참으며

해마다 이맘때면 하던 책상서랍과 명함 정리를 하지 않는다.


정리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기에 애꿎은 빈 카드 집과 빈 명함 집을 버리다보니

휴지통이 금세 꽉 찬다.


나뭇잎도 다 떨어진 만추(晩秋)의 골목에 나목(裸木)의 그림자가 길게 끌린다.

어쩌다 두 번씩이나 핀 장미꽃은 풀이 확 죽었고, 뚜벅뚜벅 내 발자국소리만 골목에서

반향(反響)을 일으킨다.


인간세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무엇일까.

대통령의 탄핵, 하야, 퇴진, 촛불 등으로 온종일 이 세상은 난장판이고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


5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지리산 중산리의 시퍼런 하늘 밑 암봉(巖峰)이 나를 압도한다.


인간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는 여행으로 세상을 벗어나야겠지.


텅 빈 가을 들녘은 쓸쓸하다.

비움은 쓸쓸함과 동반인 모양이다.

해가 갈수록 등판은 허전해지고 잔인한 가을이 된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고 한다

마음이 늙으면 몸도 더 빨리 늙기 마련이다.

황혼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라지만 함께하면 더 좋은 길이기에

몇 년간 결정을 못했던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륜이 쌓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만큼 더 많이 이해하고 배려하고 너그러워야 하는데

대부분은 거꾸로 고집이 세지고 아집이 늘어나며, 돈과 권력을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가 인정받고 대우만 받으려 하면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살아온 날이 많을수록 경륜이 쌓일수록 이해와 배려를 하고 포용을 하면 얼마나 멋진

세상이 될까.


12;05

지금 해발고도 530m.

당초 영하로 기온이 예보되었지만 영상(零上)으로 올랐다.

정상을 품은 능선엔 몇 도나 될까.


지금 영상 2도니 100m당 0.65도씩 하강한다면 영하 8도 가까이 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정상엔 제법 춥겠다.


12;20

장터목 대피소 예약을 확인한 관리소 직원은 지금 시각이 12시가 넘었으니,

벽계사 로터리 대피소에서 14시에 동절기 입산통제를 하는 관계로 '칼바위 삼거리'에서

좌측 장터목 방향으로 곧장 올라가라고 안내를 한다.


당초엔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엘 올랐다가 장터목 대피소에서 일박을 하고 하산을 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역순(逆順)으로 급히 변경을 한다.


고생이 되더라도 첫날 천왕봉 정상까지 올랐다가 장터목대피소에서 쉰 후 바로 하산을 하면

부담이 훨씬 덜할 텐데,

내일 천왕봉 정상엘 올랐다가 하산을 하여야 하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지리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올벚나무를 비롯해 식물이 1,369종이나 되고,

또한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는 사향노루, 하늘다람쥐, 반달가슴곰, 수달 등 포오류가

40종, 큰소쩍새, 올빼미 등 조류가 94종, 양서 파충류가 22종, 곤충류가 2,537종 등이

서식하고 있어 대단한 산이라고 안내판이 스스로 자랑한다.


12;30

하늘로 통하는 통천길로 들어선다.

갈아입을 옷, 침낭, 생수, 라면, 소주와 행동 간식을 넣은 배낭의 무게가 10kg을 넘는데

평소 산행할 때보다 두 배 이상 나가는 무게라 내 체력이 버틸까.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언제 제 정신을 차리려나,

산천은 평화로운데 인간세상만 시끄럽구나.


이곳에 경보방송용 스피커가 언제 설치되었을까.

지리산에 큰 사고가 있었지.


내 기억으론 오래전 지리산에서 큰 사고가 있었는데,

1998년 7월 31일 밤부터 8월 1일 새벽 경남 산청군, 함양군, 전남 구례군 등 지리산 일대에

100mm가 넘는 폭우가 내리면서 계곡등지에서 잠을 자던 야영객과 계곡 인근 마을주민 등

98명이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급격히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 숨지거나 실종된 큰 사건이

있었다.


 당국의 안일한 시설관리와 야영객들의 안전 불감증이 불러온 참사로 질타를 받더니

그 이후엔 철저한 통제와 관리가 잘되는 모양이라 이곳만은 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이슬이 밤 새워 파란 조릿대에 내려앉았다.

하늘은 밝은 빛으로 충만하고 구름은 산마루를 넘어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한동안 잃었던 하늘을 되찾았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늘 뿌옇게 가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지리산의 영험한 기운에 밀려 다 사라졌다.


초겨울의 계곡을 타고 우리가 가야할 장터목대피소가 4.6km가 남았다.


세 번 째하는 지리산 산행을 잘할 수 있을까.

5시간 이상을 올라야 하는데 내 체력이 무사히 버티려나.


20년 전엔 40대 초반이라 별로 힘들지 않게 올랐다가 당일 하산해 황매산 기슭으로 이동하여

흑돼지 추렴도 하고 이튿날 체력 부담 없이 황매산(1,108m)또 올랐는데,

이젠 등판에 쌓인 세월과 내 체력이 정비례가 아닌 반비례를 하는구나.


13;17

1.3km의 산길을 한 시간 정도 오르니 칼바위(해발 800m) 갈림길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시간을 체크해도 14시까지 로터리대피소를 통과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관리소 직원이 말한 대로 장터목 대피소로 곧장 오른다.



그동안은 조급함으로 빨리 달리기에 급급했던 삶였지.

금년도 달력(月曆)이 한 장 덩그러니 남았다.


이젠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찰나의 시간이 된다.

어떤 친구는 달력의 남은 장수가 보기 싫어 일부러 일력(日曆)을 구한다고 한다.


동토(凍土)를 뚫고 올라온 새싹과 나뭇잎들의 싱그러웠던 모습은 과거로 돌아갔다.

조릿대를 빼고 삼라만상이 퇴색해간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썰렁하게 만들어 모자를 꺼내 쓴다.


잠시 머물렀다 떠난 가을이라 낙엽 밟는 운치도 느낄 새가 없었다.

가을의 끝자락이 아니라 본격적인 초겨울에 쉽게 오를 수 없어 더 좋은 천왕봉을 오른다.


며칠 만에 하늘을 찾았지,

영하 5도로 떨어진 날씨에 안개와 구름은 사라지고 하늘은 찬란하게 빛난다.

정신을 뺄 정도로 사나운 인간세계를 벗어나 계곡 길로 접어든다.



13;42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배낭무게는 어깨근육을 심하게 압박한다.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어가며 천천히 오른다.


산은 계곡이 있어야 생기(生氣)가 돈다.

온갖 기암괴석을 아우르는 물길이 출렁다리 아래로 흐르고,

최고급 가구재로 각광을 받는 '노각나무'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띄고, 멸종위기라는

'히어리나무'도 간혹 보인다.



중간 중간에 반달곰을 보면 조치해야할 주의사항이 붙어있 건만,

그 흔한 다람쥐나 산토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반달곰을 만나는 행운이 있을까.


문득 며칠 전 뒤늦게 본 '대호'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조선총독부와 사냥꾼 최민식,

'지리산에서 산군(山君)이라는 대호(大虎)에게 아내를 잃고, 사냥을 나갔다가 늑대에게

죽은 아들 석이를 대호가 최민식의 집 앞에 두고  가자, 집을 불태우고 대호(大虎)를 찾아간

최민식은 대호와 함께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는 내용의 영화다.


호랑이 가죽을 좋아하는 총독부 경상남도장관의 비위를 맞추려 일본군이 조선인 포수대를

동원하여 대호를 쫓고 쫓기며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장면에서 포수 최민식의 고뇌 어린

표정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한사람인 최민식,

그가 첫 드라마에서 이휘향의 동생역인 '쿠숑'으로 열연할 때 크게 성공하리라 믿었지.

그는 최근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으로 주연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주면서 관객 천만 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물소리 요란하고 작은 폭포가 나와 귀를 씻어주며 잠시 명상(冥想)에 들게 한다,

힐링(Healing)은 치유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명상은 바로 치유다.


정적명상(靜的冥想)은 좌선을 하는 정적인 자세로 하는 명상이지만,

나는 산길을 걸으며 동적명상(動的冥想)을 한다.


한 시간 이상 물소리를 들어가며 계곡을 오르니 어느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영적(靈的)인

순간을 맛본다.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나오며 마음이 편해진다.


물 흐르는 소리가 바람소리와 아우러져 나의 뇌파를 안정시켜 주고, 음이온은

마음까지 안정시켜준다.


내 마음속의 온갖 번뇌와 망상을 씻겨주는 이 작은 폭포를 세이폭포(洗耳瀑布)로

이름 짓고 싶다.


지빠귀, 까마귀소리 들리니 내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며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내가 된다. 

세상을 뒤집어 놓는 혼탁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맑은 소리에 잠시 정신 줄을 놓았던 모양이다.


조릿대가 무성하고 물소리가 따라오는 산길,

며칠간 하늘과 대지를 무겁게 눌러대던 구름이 걷히고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다.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푸른 옥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沼)를 만들었고

넘친 물은 너럭 암반을 덮는다.


14;40

거대한 너덜지대(1,187m)를 만난다.

98년 7월 31일 집중호우로 위에 있는 두 급경사 지류에서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려와

완경사인 이곳에 넓게 퍼지며 쌓인 너덜지대는 폭이 100m 가 넘는다.


비슬산의 암괴류나 무등산의 암괴류보다 규모는 작지만 여기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내가 또 어디서 암괴류(岩塊流)를 만났지?


밀양 만어산의 암괴류는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최근 정선 노추산에서도 만났지.

거대한 암괴류를 품은 지리산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새들이 날며 하늘에 낙서를 하길 바ㄹ지만, 구름도 없는 하늘에선 강한 바람만

내려 보낸다.


한 물소리가 들리더니 '유암폭포'가 나온다.

지금 고도가 해발 1,500m나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폭포인가.


산길 옆으로 나랑 보폭을 맞추며 따라오던 물소리는 해발 1,500m를 넘어서자 신기하게 그쳤다.

여기서부터 세상은 얼음의 세상이다.


군데군데 고드름이 열리고 땀 때문에 재킷을 벗은 몸에 싸늘한 바람이 부딪히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유암폭포의 사진을 찍다보니 일행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쫓기듯 오르며 마음에 여유가 없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모든 것은 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시간에 쫓기듯이 살면 그 시간은 더 빠르고 짧아지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위(四圍)를 둘러보며 오르면 시간도 따라와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이 길을 또 오른다는 약속을 할 수 없으니 천천히 느리게 오르며 즐기기로 한다.



마음속에 정리해야 할 것들,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

오늘은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리라.


고도계는 해발 1,552m를 가리킨다.

대피소까지 200여m를 남기고 길은 더 가팔라진다.

오로지 두 발로만 올라야 하는 봉우리 앞에 내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진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느림의 미학인 모양이다.


배낭의 무게로 어깨가 아프다.

지금은 고통을 느끼지만 얼마 후에는 성취감으로 들뜨겠지.


지리산엘 황혼의 나이라도 오르고 싶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이 있더라도 오르고 싶었다.

오르면 내 삶의 버킷 리스트에서 지워도 되겠지.


시계는 16;18분을 가리킨다.

한 시간 후면 어둠이 닥칠 텐데, 숨을 몰아쉬고 뒤돌아서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본다.


늦은 햇살이 겹겹이 늘어선 등성이 속을 비춘다.

흰색, 검은 색, 누런색이 뒤섞여 거칠고 웅장한 분위기의 아래능선에서 올라오는

칼바람이 가슴속을 써늘하게 만들며 흘린 땀을 씻어준다.



곧장 위로만 치닫는 길,

오매불망( 寤寐不忘) 천왕봉만을 향해 애걸복걸 하듯 올라야만 하는 길,

산길에서 만난 고사목(古死木)은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흐르는 시간은 멈출 생각이 없다.

낳고 성(盛)하고 쇠(衰)하면 소멸(消滅)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시간과 함께 달려가는 나이 탓인지 쉽지가 않다.

나도 서서히 세월과 함께 더불어 사라지려나.

죽은 고사목은 죽어서도 산길에 조화를 이룬다.


16;35

장터목 대피소가 코앞에 나타나고 기진하였으나 식수대에서 낯선 모녀(母女)가 주는

물 한잔으로 기운을 차린다.

옛날 산청 시천 주민과 함양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場)을 세우고

물물교환을 했다는 장터목에 올라선다.


다행인지 155명 수용시설인데, 오늘 머무를 사람은 28명이라고 한다.

지난번 중청대피소에서 꽉 찬 인원으로 땀 냄새와 소란으로 곤혹스러웠는데

오늘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겠다.


햇살이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고, 장터목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가히 선경(仙景)이다.


내일 새벽 올라야 할 길을 확인하고 대피소 뒤로 돌아간다.


장터목산장(1,650m)의 뒤로 돌아가니 성난 바람은 나를 날려 보낸다.

몸이 휘청거려 카메라 셔터를 제대로 누를 수가 없다.

산등성이를 뒤흔드는 바람소리는 차라리 비명에 가깝다.


지금 풍속은 얼마나 될까.

재킷을 벗고 티셔츠만 입은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몇 커트만 찍고 황급히 대피소로

들어간다.


저 봉우리는 반야봉일까.

저기도 나에게는 피안(彼岸)의 세계구나.


겹겹의 지리산 능선에 스며든 햇살은 부채의 살처럼 펴지고,

암산(巖山)같이 화려하지 않으나 잠시라도 지리산의 깊은 맛을 보여주니

무거운 배낭 메고 땀 흘리며 4시간을 걸어 올라온 대가를 충분히 보상 받는다. 


지리산은 높고 거대하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 되었고, 면적은 440.485㎢로 북한산 국립공원의

약 5배, 여의도 광장의 1,000배라고 한다.


주능선인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28km에 이르고 중산리나 대원사쪽까지 계산하면

훨씬 더 길다.


작년부터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심사숙고를 했다.

2박 3일 종주코스로 오를 것인지, 아니면 당일 단거리 코스인 중산리~천왕봉~장터목~

중산리 코스를 택할 것인지, 하절기 또는 동절기에 오를 것인지,


배낭의 짐은 어느 정도가 적정할지, 식수, 식량문제, 회갑을 지난 나이인데 일행들의

체력이 괜찮을지 등 모든 게 나에겐 검토를 하고 숙고를 해야만 했다.


17;20

해가 떨어졌다.

수은주는 영하 6도를 가리키고 시간이 흐를수록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겠지.


군대 침상과 같은 대피소의 한켠에 자리를 잡고 침낭에 몸을 뉘인다.

코고는 소리, 두런두런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11.  25.  05;00

천왕봉의 일출을 보려는 팀들이 부산하게 준비를 한다.

잠깐 숙소밖으로 나오니 영하 11.9도에 풍속이 초속 30m로 가히 태풍급이다.


세찬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는 괴기스럽게 들리고, 등산객들은 공포스런

소리에 잠시 주춤거린다.

나도 저 광풍(狂風)속으로 몸을 던져야 하나?

마음이 주춤거리니 몸도 위축이 되어 출발시간을 늦춘다.


06;50

이마에 헤드랜턴을 달고 운행을 시작한다.

일행이 여럿이기에 공포심은 날려 보냈지만 잠을 제대로 못자고 된비알을 오르려니

시작부터 숨이 막힌다.

버프로 입을 가려보지만 입김이 이마로 올라와 금세 눈썹에 고드름이 열린다.


밤새도록 대피소 지붕을 잡아 흔들던 광풍(狂風),

잠을 설치게 하던 안개바람은 몰아(沒我)의 기쁨을 주는 상고대 풍광을

연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 세상은 설국(雪國)이 아닌 상국(霜國)으로 변했다.


상화(霜花)터널 속을 지나며 갑자기 얼굴이 아프다.

매서운 바람에 날라 온 서리꽃이 얼굴을 마구 때린다.


이런 바람에도 상고대가 형성되고 서리꽃이 바람에 날라 와 얼굴을 때리다니

나의 평범한 상식이 깨졌다.


국민안전처의 태풍경보 기준은 순간 풍속이 17m/s이상이다.

장터목 대피소의 전광판엔 분명 풍속이 30m 가 넘었으니 초대형 태풍급이 아닌가.


여기는 강변이 아닌 남한의 내륙지방에서 가장 높은 지리산의 주능선이다.

해발 1700m를 넘어선 능선에 서리꽃이 날라 다닌다.


강변은 영하 10도 이하, 습도 70~80%이상, 풍속 1m이하일 경우에 상고대가 형성된다.

그러나 산 정상이나 주능선은 영하 6도 이하, 습도 90%이상, 풍속이 3m/s 이하라야

상고대가 형성된다.


지금 결빙점(結氷點) 이하로 떨어진 안개는 가시거리가 50m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하다.

아무리 습도가 높고 온도가 결빙점 이하라도 지금 풍속은 초속 30m가 넘는 태풍급

바람인데도 상고대가 형성되고 떨어져 나온 서리가 내 얼굴을 때리니 자연이란 신기하게도

내가 알던 얄팍한 상식을 무참히 깨버린다.


서리가 살아 계속 얼굴을 때리고 맞은 부위는 따금거린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어둡고 힘이 들더라도 바람을 헤치고 나가야겠지.

이럴 때일수록 비겁하게 뒤에 숨지 않고 자세를 바로 세우고 나 자신을 변화시킬

용기가 필요하다.


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써서 머리카락이 백발(白髮)이 되는 건 면했지만 눈썹이 얼어

붙고, 숨이 막혀 간간히 고통스런 기침도 나온다.


07;10

600m를 올라오니 제왕이 자리했다는 제석봉(1,806m)이 나온다.

지리산에서 천왕봉(1,915m), 중봉(1,875m)에 이어 제3 고봉(高峰)인 제석봉을 넘자

천왕봉까지는 1.1km가 남았다.


짙은 안개로 3대가 덕(德)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 풍경은 포기한지

오래니 천천히 안전하게 운행을 한다.

몰아치는 바람에 얼굴을 들기가 힘들고 이정표도 추위와 바람에 꽁꽁 얼었다.



여명 빛이 장엄하게 올라오다 안개에 막혔다.

그래도 서운한지 틈새로 붉은빛을 보낸다.


온통 하얗게 덧칠된 숲에 여명 빛이 스며드니 아찔하리만치 화려함을 연출한다.

서리꽃으로 치장된 나무의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얼어붙은 인고(忍苦)의

무게가 배어 있다.


추운 세상을 묵묵히 견딜 줄 아는 지리산의 숲은 진중한 무게가 배어 있고,

나는 그 숲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지리산의 산신령이시여!

나에게 거친 풍경을 주는 것도 고맙지만 안개를 조금이라도 거둬서 장엄한 풍광을

보여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첩첩산중의 붉은 빛 담은 화폭은 은은한 깊이로 내 가슴속에 스며들고,

절제된 멋스러움을 카메라에 담는다.


폭풍의 악몽은 살인풍이다.

문득 지난겨울 위험했던 완주의 안수산이 떠오른다.


산마루의 기쁨도 잠시 거친 길이 이어지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긴 구상나무 고사목에도 상고대가 엉켜 붙어 생선뼈처럼

하얗게 탈색되었다.


가문비나무 고사목은 비스듬히 기울어 있고 그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구상나무, 철쭉나무, 국수나무숲은 그림 같은 상고대 터널을 이루고,

나는 서리꽃이 떨어질세라 그 속을 조심스럽게 빠져 나간다.


거친 바람이 자꾸 겁을 준다.

발밑의 시야는 좋지 않아도 헤드 랜턴을 끄고 조심스럽게 등성이를 오르지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제석봉을 지났는데도 여전히 오름길이다.

천왕봉은 나의 인내력을 테스트 하는가 보다.

다행히 배낭의 무게는 어제보다 확실히 줄었기에 어깨는 덜 아프다.


07;26

장터목에서 1km를 올라와 천왕봉까지 0.7km가 남았다.

손끝이 얼어 감각이 없다.


불과 30여 분에 이십여 장밖에 찍지 못했는데 카메라는 배터리를 교환하라고 경보를

계속 보낸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니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었다.

다행히 허벅지 체온으로 보호한 배터리로 교체하니 한참 사용해도 좋을 용량이 표시된다.


잠시 주춤했던 칼바람이 불어 소리를 질러도 모를 정도로 서로의 대화도 어렵다.

한걸음 한걸음이 고통스러운 발걸음이다.


그래도 나의 속도를 자연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한걸음 한 호흡으로 걷는다.


안갯속 산길은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룬다.

조화를 이룬 거친 산길에선 입을 다물고 묵묵히 오를 수밖에 없다.


하얀 땅 위에 족적(足跡)을 남기며 걷는 길,

두 발로 걸으며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니 바로 시공초월(時空超越)이구나.



다른 사람이 이 나이에 지리산을 올랐다고 미친 게 아니냐고 말을 한다면

반복되는 진부한 삶에서 나 자신을 알고자 오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다.


애써 오르면서 힘이 드니 황혼의 향기는커녕

얼굴을 때리는 안개와 바람이 주는 짙은 고독에 몸서리친다.


어느 산이던지 대부분의 산에는 하늘로 오르는 통천문(通天門)이 있다.

내 고도계는 해발 1,815m를 가리킨다.


다른 산에서는 신선이 하늘로 오르고자 하면 자유로운데,

유독 지리산에서만큼은 신선도 반드시 이 통천문을 거쳐야 하늘로 오를 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같이 평범한 인간들도 해발 1,915m의 천왕봉을 오르려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곳을 경건하게 통과하여야 하겠지.


통천문 주변에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란 뜻의 천주(天柱)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찾지를 못하고 그냥 오른다.


하늘은 점점 가까워지고 내 목적지는 아직도 안개의 심연(深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고대가 눈부신 봉우리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곳의 때 묻지 않은 자연은 안개속이라도 시선 닿는 곳마다 하나하나가 작품이다.


겨울 산은 눈의 나라이자 바람의 나라이다.

은빛 찬란한 상고대가 기암(奇巖)을 꼭 감싸 안은 채 몽환(夢幻)의 세계를 연출하고,

그 사이를 간신히 오르는 우리에게 심술궂은 바람이 마구 몰아친다.


산의 높이를 점차 올리자 험난함은 더해가고 산길의 굴곡도 심해진다.

겸손과 바람에 잔뜩 키를 낮춘 나무들 사이로 오른다.


계단을 올라 여유를 찾자 입을 가렸던 버프를 내리고 폐부 깊숙이 찬 공기를 들여 마신다.


하늘과 맛 닿은 땅,

땅 위의 땅에 빠르게 안개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서리꽃이 흩날린다.


예전엔 이곳에서 반야봉의 두툼한 덩어리를 바라봤는데, 반야봉은 깊은 심연으로 사라졌다.

비록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서리가 하얀 길을 만들었으니 겨울산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지리산은 남한 내륙의 제1 고봉이라 쉽게 찾지 않는 산행지다.

늘 비슷한 산행에서 벗어나 가끔은 죽도록 힘들 게 오르고 싶었기에 내 체력의 한계를

느껴 보고도 싶어 천왕봉엘 오르는 거다.


어제 무거운 배낭을 짊어져 기력이 많이 소진되었기에 내 체력이 감당할까 걱정을 했지만

한걸음 한걸음씩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 코앞이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선 천왕봉,

자연의 속도에 맞추는 건 기다림의 시간이라 했지.


08;11

정상을 30여m 앞두고 이젠 힘이 부친다.

마지막 한걸음 한걸음 최선을 다하면 전설을 품고 영겁의 시간을 지킨 정상이 나를 안겠지.


잠시 머물렀다가는 이방인의 몸이지만 정상엔 공기마저 엄숙하고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인간의 욕심이 티끌이 되는 곳에서 무엇을 빌고 무엇을 원할까,

그냥 욕심 없이 살면 되는 게지. 



08;17

장터목에서 출발한지 1시간 20분 만에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의 지리산(智異山) 천왕봉(1,915m)에

올랐다.


강풍이 몸을 수시로 기우뚱하게 해 정상석을 잡아야 겨우 몸이 안정된다.

하늘에서 형성된 제트기류가 아래로 내려 보내는 모진 바람과 아래 계곡에서 치고 올라오는

골바람은 숨을 막히게 한다.


지혜(智慧)가 하늘에 맛 닿은 곳,

백두산에서 무려 1,625km나 되는 백두대간 산줄기를 흘려 내린 곳의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내가 섰다.


백두산은 지혜의 머리고,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지리산은 세상과 다른 지혜를 얻는 산이라

해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했다.

지리산의 머리인 천왕봉을 내가 딛고 있으니 나도 지혜로워지려나.



정상석 뒷면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예전에는 '만고 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 天王峰 天鳴猶不鳴)이라는 청석표주와

지리산 산신령을 봉안하는 성모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남명 조식 선생은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라고 했다.

서산대사는 우리나라에서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이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그런 산을 내가 두 발로 올라와 정상석을 쓰다듬는다.


3대가 덕(德)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의 일출은 심한 안개로 포기하고 출발하였으니

볼 리가 없다.


천왕일출(天王日出), 노고운해(老姑雲海), 직전단풍(稷田丹楓), 반야낙조(般若落照),

벽소명월(碧宵明月), 불일폭포(佛日瀑布), 세석(細石)철쭉, 연하선경(烟霞仙景),

칠선계곡(七仙溪谷), 섬진청류(蟾津淸流)를 지리산 10경(景)이라 한다.


그중 1경(景)인 천왕일출(天王日出)을 포기하고 올랐어도 마음은 편하다.


20년 만에 다시 오른 지리산 천왕봉,

세 번째 오른 천왕봉에서 내 가슴은 마구 뛴다.


내 생애에 또 오를 수 있을까?

황혼의 육체에 버거운 지리산 산행을 또 할 수 있을까,

이젠 여생(餘生)의 버킷 리스트에서 지우고 싶다.


그렇게 원하던 천왕봉엘 올랐으니 먼 훗날이 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나의 묘비가 생긴다면 앞면에 '직장에서 신명나게 일 하고, 원 없이 산에

다니고, 신나게 잘 놀다갔기에 성공한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써 달라 부탁을 하고 싶다.


물론 장기기증 후 화장으로 한 줌의 재가 되어 별(星)이 되고 꽃(花)이 되고 돌(石)이

되겠지만 유쾌한 내 묘비를 상상만 해도 즐겁다. 


친구가 산(山)의 높이를 어떻게 재느냐고 묻는다.

세상을 살다보면 까마득히 잊고 사는 일들도 많다.

그렇게도 관심을 가지고 2014년 7월 8일 촬영하였던 수준원점이 2년이나 지나서야

생각이 난다.

 

아프지 않고 먹고 살만하고, 어려움 없이 살다보니 생각이 나질 않은 건지,

건망증이 도진 건지 컴퓨터에서 사진을 찾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대부분 산의 높이(標高)는 해발(海拔) 000m라고 표시한다.

해발은 해수면을 0으로 보고 그보다 얼마나 높은가를 잰 숫자인데,

바다의 기준면으로부터 어느 지점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이것을 표고, 해발 또는

진고(眞高)라 한다.


따라서 산의 높이는 산 밑의 평지로부터의 높이가 아니라 해수면으로부터의 높이를

말하는데 고도를 측정하는 기준인 수준원점(水準原點)은 그 나라의 특정한 바다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 지역 높이(해발고도)의 기준이 되는 수준원점은 인천앞바다의 평균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여 수준원점은 26.6871m의 인천 인하대학교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수준원점은 해발 0m가 아니라 26.6871m로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국토

높이의 기준이 된다.


08;20

최종 목적지인 중산리가 5.4km니 서둘러 내려가야 12시경에나 도착한다.

너덜로 이루어진 매우 지루한 하산길이라 땅바닥만 쳐다보고 가면 고개와 어깨가

매우 아프겠지.



커다란 덩치로 가만히 앉아서 침묵을 지키는 천왕봉,

안개바람 몰아치는 천왕봉 정상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하산을 시작한다.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또 다시 오르겠노라고 정상에 손을 흔들며 안녕을 한다.


노고단(1,502m)~반야봉(1,732m)~명선봉(1,586.3m)~영신봉(1,651.9m)~

제석봉(1,806m)을 거쳐 이어지는 천왕봉(1,915m).


거대한 산줄기를 타지 않고 가장 짧은 단거리로 올라왔다가 내려가도 지리산 산줄기는

단순한 산줄기가 아니다.

신령스러워 감히 범접할 수 없고, 살아 움직이는 영산(靈山)에 올랐으니 마음이

뿌듯하다.



친구가 장갑을 벗고 얼은 손으로 꼬냑 한 잔을 따라준다.

꼬냑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내려가며 주는 짜릿함은 순식간에 추위를 녹여준다.


지리산 정상에서 술 한 잔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은 주위의 풍경도 달라지게 한다.



큰 까마귀 한 마리가 구상나무 고사목에 앉아 나를 기다린다.

하나님에게 천사(天使)라는 심부름꾼이 있다면 지리산 산신령에게는 까마귀라는

호위시중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최후의 호랑이가 사라진 지리산,

그 영화에서는 대호(大虎)를 지리산의 임금인 산군(山君)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산에서 산신령은 단군(檀君)이 아닌 호랑이인가.


까마귀가 안개 낀 하늘을 길게 돌아 다시 고사목에 내려 앉아 우리를 경계하는 건지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건지 길게 까~악 댄다.

지리산 곳곳에 스며든 도인(道人)이 진짜, 가짜, 초자를 불문하고 약 3,000명 가까이

된다는데 그 중에 나를 한사람인줄 여기는가 보다. 


지리산 천왕봉의 산신은 여신(女神)으로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평민, 양반, 그리고

왕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성모할매 산신에게는 여덟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들이 한반도 팔도의 최초의 산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장터목에서 오르는 능선의 상고대는 바람이 부는 반대방향에 엉켜 붙었는데,

법계사로 내려가는 길의 나무에는 상고대가 전신을 감싸 무늬가 다양하다.



상고대로 치장한 겨울나무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함이다.

바다 속의 산호가 이보다 더 화려할까.

가을 단풍이 오색(五色)을 자랑한다면 상고대를 입은 백색(白色)은 화려함의 극치다.


상화(霜花)라는 보석을 입은 나무들 사이에 길게 달린 고드름은 몽환의 풍경을 연출하고,

푸른 하늘은 안개에 숨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햇살이 스며들어 다이아몬드 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보지 못해 못내 아쉽다.


20년 전 법계사에서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 네 발로 기어올랐던 등산로는 데크가 깔려

안전한 산행을 하게한다. 



예전에 네 발로 오르다 만났던 천왕샘.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물을 마셨던가, 가까이 다가가니 남강의 발원지인

천왕샘이 다 얼어버렸다.


조금 전 올랐던 천왕봉이 지옥이라면, 이곳은 바람이 없고 상고대만 볼 수 있는 천당이다.

능선과 봉우리를 기준으로 하여 날씨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가.


바람 한 점 없이 따스한 봄날처럼 순하다.


천상(天上)의 구상나무는 하늘로만 뻗어가는구나.

우리나라에서 한라산 덕유산과 더불어 가장 많은 구상나무가 사는 곳,

지리산 구상나무는 기다림과 설렘, 그리고 그리움이다.


한국 토종 나무로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각광을 받는 구상나무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면서 언제부터인지 많은 나무가 시름시름 죽어간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조금 전 정상에 뛰어 올랐던 청년이 다시 뛰어서 하산을 한다.

산악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인가,

산에서 저렇게 뛰어 다니면 무릎이 금방 망가질 텐데.


몇 년 전 고인이 되었다는 사람,

검단산에서 한겨울에도 반바지 반팔 복장으로 뛰어다니던 사람이 문득 생각난다.


개선문(해발 1,700m)을 빠져 나오자 어두웠던 하늘에서 신기하게도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며

힘든 몸에 힘과 용기를 준다.


덕유산이 박무 속에 아련하고 거대한 백두대간이 꿈틀거린다.

끝없이 펼쳐지는 산군(山群)에 여러 산봉(山峰)이 솟았다.


다음엔 저곳 어느 산을 오르려나, 산은 그 자체로 그리움의 대상이기에

멀리 보이는 소소한 풍경이 눈길을 끈다.



덕유산 줄기, 백운산 줄기, 무등산 줄기가 첩첩이 엉켜서 꿈틀거리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09;57

법계사(法界寺)에서 울려나오는 범종(梵鐘)소리가 그립다.

뎅 ~데엥~울리며 여운을 길게 남기는 산사(山寺) 범종의 맥놀이가 듣고 싶다.


산을 다니며 많은 종소리를 들었지만 우리나라 내륙에서 최고로 높은 산,

최고로 높은 위치에 있는 법계사의 범종소리가 듣고 싶다.


10시가 되면 들리려나,

안온한 바람결을 타고 내 귓가에 머무르려나,

삼라만상의 영혼을 깨우는 울림이 있으려나.


산사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에게도,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도

위안을 주는 영혼의 묘약(妙藥)이다.


새벽 예불엔 28번을 타종(打鐘)한다.

28번을 치는 이유는 욕계 6천, 색계 4천, 무색계 18천을 합친 것이며, 여기서 계(界)란

중생들이 세상을 살며 지혜를 깨우치고 체험하는 세계를 말한다.


저녁 예불 때는 33번을 타종하는데,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수미산 꼭대기에 선견천이라는 제석천이 사는 궁전과

제석천이 다스리는 사방 32천을 합한 천상계 33천을 의미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 현판이 일주문 사이로 살짝 보인다.


천왕봉에서 2km를 내려와 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는 인제 방태산(1,444m)보다

높고, 소백산(1,439.5m), 가야산(1,430m), 점봉산(1,424.2m) 정상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하늘 아래 첫 가람이다.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는 곳은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영축산 통도사 등 우리나라에 5대 멸보궁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적멸보궁이 있어 내 상식을 깬다.


서기 544년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 보다가 이곳에서

"천하의 승지(勝地)"라며 탄성을 지르고 세웠던 절,

많은 전란 속에 피고 지기를 반복했던 법계사의 일주문은 연륜을 느끼게 한다.


산신각의 산신할매를 보고 삼배로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불교신자가 아니니 마음속으로만

삼배(三拜)를 드리며 종소리가 들렸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내 배낭엔 무엇이 들었을까.

옷, 양말, 생수, 간식인가, 눈에 보이는 것은 잡동사니겠지만,

눈에 안 보이는 번뇌, 갈등, 집착, 원망, 실망 등 잡다한 것들도 들었다.


비우려 했어도 비우지 못했다.

본래 참마음을 지킬 수 없었으니 비우지 못하였겠지.


비우면 채워지고 또 비우면 또 채워진다고 하길래

불필요한 것과 욕심을 하나씩 비워 내려가자고 몸부림을 치지만 어깨만 아프다.


법계사 갈림길이 나온다.

이젠 법계(法界)에서 벗어나 속계(俗界)로 내려가야겠지.


10;02

로터리 대피소가 분주하다.

아직 입산통제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등산객, 하산객 모두가 여유를 부린다.


지리산의 바위 하나하나가 다 신비롭지만 이 바위는 더 신기하다.

흔들바위인가 두 손으로 밀어도 흔들리지 않고, 비바람 불 때 사람이나 산짐승이

대피하기 아주 좋은 장소로 보인다.


잠시 뒤돌아보다 나랑 눈이 마주친 봉우리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얄밉다.

정상에서는 그렇게 흔들어대더니 나의 하산 길에 날씨가 좋아져 괜히 심술이 난다.


바람과 운해 속에 천하절경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 미망(迷妄)속의

환영(幻影)이겠지.


최단거리로 올랐다가 내려왔어도 천왕봉은 남한 제1의 고봉이다.

이틀 연속 10여 시간을 돌과 너덜을 밟으며 걸었으니 무릎은 아직 괜찮은데

엉덩이쪽 엉치뼈가 아프다.


며칠 고생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가 없지만 스틱을 최대한 활용해 체중을 줄이는

보법(步法)으로 천천히 운행을 한다,


엉치뼈도 아프고 대퇴사두근, 비장근과 경직된 어깨 근육이 고통을 지른다.

얼마나 더 움직여야 되나, 얼마나 더 내려가야하나 몸이 무거우니 마음도 무거워진다.


어쩌면 산다는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수렁일 수도 있다.

마음을 먹으면 수렁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오히려 그 수렁을 관찰할 수도 있다.

살며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과 억지로 거리를 두려고 해선 안 된다.

저절로 거리가 생겨도 순간순간 알아차리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11;30

하산을 시작한지 세 시간 만에 칼바위에 도착한다.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쉬고 싶다.


인생에서 이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 많았건만 겨우 이틀 산행에서 비명을 지르다니

나답지 않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 무너질 일이 없으니 나 자신을 믿고 계속 움직이며 나아가자고

스스로 다짐을 하지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어느 순간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는 생각이 들며 온몸이 떨린다.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사물과 현상을 다시 보게 된 거다.


새롭게 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아(自娥)의 인식에 변화가 오고, 진부함에서 일탈하여

모든 사물이 새롭게 보이며 힘을 얻는다.



12;00

온몸 구석구석이 다 아프다.

그래도 목적을 달성했으니 마음은 가뿐하다.


가는 세월 순서가 없다는데 좋은 친구들과 산천초목을 같이 하고 후회 없는 산행을 했으니

돈도 명예도 필요 없다.

자연이 주는 고마움을 누리다가 부르면 미련없이 가야겠지.


색이 바래지는 세상에서 꽃 한 송이를 만난다.


                 <            이야기


                         엷게 둘렀던 안개가 슬며시 사라진다.

                         높고 푸른 하늘에

                         먼 곳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더니 

                         내 안의 이야기도 전하라 한다.


                         길가에 쓸쓸히 핀 들국화에

                         초겨울 햇살 한줌 떨어지고

                         생을 이별하는 풀벌레소리 가슴을 울린다.

                 

                         빈 몸이 되는 나무를 안고

                         그리움의 여행길에서

                         내 마음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린다.                             석천>


길가에 핀 '벌개미취'에 초겨울 햇살 한줌 떨어진다.


12;05

장터목에서 출발한지 5시간이나 걸려 통천길 입구에 도착한다.

나는 다 내려왔으니 여유롭게 고행(苦行)을 시작하는 다른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인생길에선 산행 길과 마찬가지로 애로와 시련의 그늘이 있다.

이번 산행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았고, 산행을 마치며 나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에너지를 발산 할 수 있었고, 희망적인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함께하는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다.

혼돈(混沌)의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에서 지리산을 지운다고 마음을 먹지만 언제든 미친바람이

그리우면 또 찾아오겠지.


                            2016.  11.  24~25.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나서

                                                                  석천  흥만  졸필


에필로그;

지리산 산행의 후유증으로 허벅지가 아파 11. 26일 아차산 산행을 포기한다.

11. 30일 송년회에서 만난 직장 선배들이 미쳤다고, 나이도 생각하라고 마구 잔소리를 한다.


물론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강한

반발심이 생기니 내가 치기(稚氣)를 부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