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20 경주 무장산(624m)의 보물

김흥만 2017. 3. 27. 12:25



2017.  1.  19.

연초가 되면 휴대폰의 진동이 밤새도록 부들부들 떤다.

새해 복을 빌어주는 글 내용은 단순하지만 연하장은 여러 기법으로 다양하게 만들었다.


해가 거듭되면서 점점 잊어지는 사람이 되는 지 예전보다 수신량은 줄었지만

새해 복을 빌어주는 고마운 분들의 마음을 내게 밤새도록 전달하느라 폰은 몸살을 앓는다.


한동안 유행했던 '복을 지으십시요'라는 말은 쑥 들어갔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라는 천편일률적인 문자가 들어온다.


12;26

자욱한 안개로 혼미(昏迷)한 세상을 달린다.

심한 안개와 영하의 날씨는 들판을 하얗게 만들었고 나무들은 상고대가 피어 반짝인다.


한 달 전부터 기획한 경주 무장산 산행,

5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무장산 들머리엔 찬바람만 몰아친다.


추위 탓인가 지진의 여파인지 산객은 우리밖에 없어 분위기기 썰렁하고,

2009년 인기를 끌던 드라마 '선덕여왕'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덩그러니 서있다.


'복(福)'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힘을 초월한 운수를 말 하는가.

서로가 빌어주고 간절히 원하는 복의 정체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각자의 관념(觀念)에 따라 복의 기준이 제각기 다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富)를 누리며, 관운이 좋으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사업을 하면 걱정 없이 번성(繁盛)하고, 자손까지 번성 하는 게 일반적인 행복이다.


누구는 오래오래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행복이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물질적 사회적 요건이 충족이 되어야 행복하다고 하며, 어떤 이는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도 한다.


부족함이 없이 편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는 소극적인 생각보다는

즐거움과 기쁨 등 긍정적인 감정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행복의 핵심이 아닐까.

세상을 다 가졌어도 일상에 기쁨이 없다면 행복이 아니다.


다가올 내일 때문에 걱정을 하는 스타일이 아닌 나에게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술 한 잔하고 들어와 샤워하고 책을 보다 잠드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겠지만,

전국의 산하(山河)를 돌아다니는 게 나에겐 큰 행복이다.



행복에 목적지는 없다.

나 스스로 행복을 향해 도달하려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편해지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며 미처 지우지 못한 카톡과 문자메시지를 지워나간다.


또 일 년이 지나갔고 먹고 싶지 않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점점 몸은 예전 같지 않아 체력은 하향곡선(下向曲線)이고 허리가 약간씩 구부러진다.


이제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썩 기쁘지 않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라는 말과 '어르신' 보다는 '아저씨'라는 말이 더 듣기가

좋으니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천년의 시간을 간직한 안내판이 말없이 서있다.

이 산엔 넓고 깊은 계곡이 많은지 지도가 복잡하다.


변함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많은 곳에서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천년고도(千年古都)에 있는 무장산은 높이 올라갈수록 시간은 반대로 뒷걸음치겠지.


12;50

국립공원 특유의 짙은 갈색 이정표가 개울을 건너라 한다.

주차장에서부터 한참을 걸어왔는데도 콘크리트 포장길이 길게 이어진다.


연초부터 매일 3~5건씩 부고(訃告)가 뜬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지병이라는 내용보다는 숙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많이 들린다.

숙환이란 병의 치료 실패가 아니라 몸의 노쇠(老衰)로 간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 근육량이 감소해 신체 활동 폭이 점점 좁아진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며 보폭이 좁아지고, 손의 근력도 떨어져 물건도 자주 놓치고,

한 번에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는 양이 작아진다.


또한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 시간이 전보다 오래 걸리고 대부분은 손을 바닥에

짚고 일어나는데 자신도 모르게 '끙'하는 소리를 낸다.

이미 노쇠는 시작된 거다.


노화(老化)는 숙명(宿命)이지만 노쇠(老衰)는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

나이를 먹는 게 늙는 건 아니기에 마음을 젊게 하고 활력 에너지를 키우면 어느 정도

노쇠를 지연 시킬 수 있다.



12;50

며칠 전 가까운 친구의 부고(訃告)가 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허탈감에 몸이 떨린다.


7년간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에서 고통을 받던 친구가 별세 하였다는 한 통의 전화에

가슴이 벌렁거려 숨을 쉴 수가 없다.

작고한 친구에게 수시로 안부를 묻지 못한 죄스러움에 잠시 목이 멘다.


영안실에서 친구의 영정사진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난다.

거친 세상, 시끄럽기 만한 세상을 살며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젖은 눈가를 남이

볼세라 슬그머니 닦는다.


아직은 갈 나이가 아닌데, 폐암이라는 병으로 7년이라는 세월 사투를 벌리던 친구가

영면(永眠)에 들어간 거다.


천당과 극락이 아무리 좋다한들 목사 신부 스님도 가기 싫어하는 곳인데,

그곳으로 성급히 먼저 떠난 친구의 영정사진은 육신의 아픔과 삶의 고통에서 해탈한

모습이다.


죽어서 받는 복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신(神)이 진짜로 계신다면 예수, 부처, 칠성신, 단군신에게 안식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사람은 큰일을 겪으면 변화가 생긴다.

변명 같지만 나도 머리 수술 후 작은 변화가 생겼다.

병원에서 병과 사투(死鬪)를 벌리는 지인의 모습을 보면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정도로 소심해졌다.


따라서 지인이 별세를 하면 문상(問喪)은 빠지지 않고 가지만 웬만해선 문병(問病)을

가지 않는다.

이는 자연스런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문병을 하는 자체가 싫어졌다.


나 역시 수술 후 초라한 몰골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너무 싫었기에 문병 오는

지인이 반갑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드라마 '낭만 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의 대사가 생각난다.

'환자는 살기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의사는 고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는데,

그를 만났으면 살았을까?

이젠 부고도 지병보다는 숙환으로 뜨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나에게 소중했던 게 하나 둘씩 곁을 떠난다.

미래에 대한 꿈도 사라지고, 평생을 해왔던 일에서 은퇴를 하고, 소득이 없으니 점차

통장의 잔액도 줄어든다.

의료쇼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 아프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지만 정작 참지 못할 정도로 힘든 건 가까운 친구들의 부음(訃音)이다.

나이가 드니 본격적으로 상실(喪失)의 시대가 온 모양이다.



13;00

암곡(暗谷)이라,

깊고 어두운 계곡이라는 이름의 암곡에서 무장봉의 산행은 시작된다.

왕복 11.5km에 약 3시간 걸린다고 근무자가 설명을 한다.


지난번 다녀온 지리산이나 태백산 입구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은 없지만,

지원센터 직원의 구수한 입담은 산행을 유쾌하게 한다.



큰 배낭에 무거운 짐을 담았다가 다 빼고 필요한 짐만 짊어지고 산행을 시작한다.

어지러운 세상사에 지친 마음을 무장산은 달래주려나.


정상 한번 밟고 오는 것만으로는 잡념을 떨치기엔 역부족이겠지만 오늘은 그냥 온전히

세상과 격리되고 싶다.


계곡은 새로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門)이다.

수많은 골짜기와 협곡엔 보물이 숨어있다는데 나는 오늘 무슨 보물을 만날까.


산악회 리본의 오방색(五方色)이 눈에 띈다.

음양오행 원리에 의하면 노랑은 중앙(中央), 파랑은 동(東), 하양은 서(西), 빨강은 남(南),

검정은 북(北)을 가리키는데 예부터 오방색은 복을 가져다준다고 전해진다.


요즘은 대통령을 비롯해 국정을 농단한 몇 여인들 덕분으로 오방색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 미움을 받는다.


봄 여름 가을의 영광을 다 벗은 숲에 남은 솔바람이 빰에 와 부딪히며 나무들과 은밀한

대화를 못하게 방해를 한다.

어디선가 딱딱거리며 딱따구리가 정적을 깨고 그것을 못 참은 까마귀가 하늘에서 까악 댄다.



           <             침묵


                  매서운 북풍이 녹아버린

                  겨울 숲은 침묵이다.

                  곱디곱던 단풍잎을 땅바닥에 팽개친 채

                  겨울 숲엔 침묵이 흐른다.


                  봄 여름 가을 대화를 하던

                  작은 풀꽃들은 말라비틀어지고

                  지나가던 솔바람이 귓가에 스며든다.


                  초록이 사라진 겨울 숲엔

                  긴 침묵이 흐르고

                  지나는 나그네의 한숨만 수북이 쌓인다.             석천   >


태풍 지바의 영향으로 무장사지 방향의 길이 통제되어 무장봉으로 곧장 오르기로 한다.


당초엔 11.5km의 산행거리에 약 4시간을 잡았으나 왕복 7km로 변경을 하여 된비알을 오른다.


산길은 처음부터 제법 가파르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오르다 보면 깔딱 고개에서 숨을 헐떡이고, 때로는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하겠지.


우리나라에는 3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많다.

제주에는 고, 부, 양(高 夫 梁), 지금 이곳의 경주에는 박, 석, 김(朴 石 金)의 3성(性)이다.


산과 강을 끼고 있는 경주,

고대나 현대사회의 도시형성은 반드시 산과 강을 끼고 있어야 외침을 막으며 피할 수 있고,

필수품인 물은 생존의 필요조건이다,


문득 6부족 합의체로 의사결정을 하던 신라의 '화백제도'가 생각난다.

이씨의 시조인 알평공, 최씨의 시조인 소벌도리공, 손씨의 시조인 구례마공,

정씨의 시조인 지백호공, 배씨의 시조인 지타공, 설씨의 시조인 호진공이라,

즉,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의 6개 성(性)씨가 부락을 대표했던 진한 6부였는데,


어느날 새로운 성씨를 가진 3명이 출현하여 새 문명을 연다.

6부족의 수장들이 각각 자제를 이끌고 알천(閼川)에 모여 덕이 있는 자를 임금으로 추대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려할 때 하늘이 나정우물가에 이상한 기운을 비춘다.


그곳에서 흰 말 한 마리가 길게 울고 하늘로 올라가자 옆에 있던 알을 깨고 나온 아이가

신라의 초대 왕이 되는데 따라서 신라의 건국 시조는 박씨 성을 가진 박혁거세(朴赫居世)다.


그후 석씨가 등장하는데 석탈해는 바로 이곳 동악 토함산의 산신으로서 바다와 관련된

용왕신화와 대장장이의 신화와 연결된다.


이후 석탈해왕 9년 시림(始林)에서 닭이 크게 울어 살펴보니 황금으로 된 궤짝에서

사내아기가 나왔고, 그 사내아이가 김알지(金閼智)란 이름으로 훗날 임금이 된다.


신라는 멸망할 때까지 박씨 10명, 석씨 8명, 김씨 38명이 각각 왕으로 즉위 하였으며

그중 석탈해는 철기문화라는 새로운 문물을 들여와 왜구와 외부세력 척결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기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하며 단군 이후 첫 남신(男神)이요, 동악신으로 거다.


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3산 5악 중,

2013년 2월 27일 서악인 계룡산, 2016년 3월 24일 중악인 팔공산, 2016년 11월 24일

남악인 지리산, 지난달 12월 22일 북악인 태백산을 거쳐 내일 동악인 토함산엘 오르면

오악(五岳)을 다 오르는데 내일 눈 소식이 있어 가능할지 모르겠다. 


참나무 숲이 무성하다.

전국의 모든 산에 참나무가 많지만 이 산은 특히 더 많은 거 같다.

참나무는 뿌리가 깊고 넓으며 가지도 하늘로 무성하게 뻗기에 옛날에 참나무는 지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신목(神木)으로 숭배되었다.


재질이 단단해 방패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영국에서는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통을 참나무로

만들어 오크향이 짙게 배도록 했다.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만병통치의 영약으로 대접 받았으며 특히 작년가을에는

도토리가 풍년이 들어 지천으로 널리기도 했다.

참나무에서 열리는 도토리와 상수리는 흉년에 대비한 구황(求荒)식품으로 흉년에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는 음식이었으며 가뭄에도 참나무는 잘 견딘다.


해 갈이를 하며 특히 흉년에 앞선 해는 유난히 많이 달려 구황식품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니

금년 흉년이 될까 걱정이 된다.


13;40

묘한 산이다.

낮은 등성이지만 제법 가파르게 40분이나 올라왔는데도 주능선이 보이질 않는다.


높고 험한 산세도 아닌 부드러운 산인데, 다행이 골을 따라 돌 때마다 환한 풍경이 새로

나타난다.


능선이 보이지 않아 다소 답답했는데 서어나무 사이로 능선이 보인다.

앞서가던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산에서는 속도가 별 의미가 없다.

그냥 내 호흡에 맞춰 오르면 된다.


어느 계절에 누구하고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정상에 빨리 오르나 천천히 오르나 큰 차이도 의미도 없다.

그동안 쫓기듯 인생살이를 해왔으니 산에서만큼은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걸음에 긴장감 없이 한참을 오르다 보니 임도가 나온다.


무장봉 일대는 국유림과 사유지가 섞여 있고 1980년도까지 오리온목장이 있었기에

정상 언저리까지 임도가 나있다.


지루하지 않은 임도를 천천히 오른다.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선 까마귀가 까악 댄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단풍나무 서어나무 사이로 산은 제 깊은 속살을 보여주고,

넓은잎쥐오줌풀, 수리취의 말라비틀어진 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다.


정상인 무장봉이 1km 남았다.

나는 항상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떤 이는 쫓기듯 산을 오르고, 어떤 사람은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오르고,

또 어떤 사람은 오르다 말고 중간에서 내려온다. 


나는 왜 산에 오르는 건가.

에베레스트를 오른 유명 산악인은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내려가기 위해, 어떤 사람은 살을 빼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은 답답해서

오른다고도 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나는 그냥 산이 좋아 오르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주능선에 오르기까지 밑에선 전혀 보이지 않던 누런 초원이 막힌 속을 뻥 뚫어놓는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끝없이 펼쳐지는 억새 초원은 하늘 금을 그렸다.


14;18

다른 세상처럼 열린 굴곡의 억새 초원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늘 한 점 없는 억새밭은 초록과 황금빛을 잃은 누런빛이지만 겨울바람에 물결치는

풍경은 점묘화(點描畵)기법인가, 아니 물골법(沒骨法)과 우모준(牛毛皴)의 기법을

총동원하여 그린 한 폭의 동양화다



                <        억새의 울음


                       어쩌다 처음 온 나

                       사연도 없고 설렘도 없었는데

                       억새 울음소리에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리지.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 부러지고

                       비 오면 두드려 맞고

                       눈이 오면 눈꽃이 피면 그만인데,


                       나 왔다고 구슬피 울던 울음 멈추고

                       누렁머리 가냘픈 고개를 흔드는구나.                     석천   >


부드럽게 일렁이는 초원의 풍경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니 등판을 적셨던

땀이 금세 마르고 한기(寒氣)를 느껴 정상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산을 오르는 과정은 버림이다.

헉헉대며 땀을 버리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도 버리고 삶의 찌꺼기도 버려진다.

가슴속에 쌓였던 미움도 집착도 버린다.


굽이도는 오르막을 지나자 길이 넉넉해지고 풍경이 여유로워 힘들 줄을 모르겠다.

예전에는 40대가 불혹(不惑)이고 50대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지금 내 나이는 무엇일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나이가 아닐까.


방송에 나온 어느 전문가는 세상을 살기 가장 편한 나이가 65~75세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불혹(不惑)으로 하기로 했다.


사는 게 팍팍하고 쓸쓸한 겨울날 찾아온 억새밭,

누런 빛 휘날리며 죽은 듯 살아가는 억새와 함께 나도 바람처럼 흔들려 보자고 찾아왔는데

겨울바람에 평화로운 억새의 향연이 은밀한 보물처럼 반짝인다.


남산처럼 수많은 보물도 없건만 억새의 풍경은 마애불이나 그에 못지않은 보물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게 쌓여 도착한 정상에서 방목되던 소들이 뛰어놀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14;30

동대봉산 무장봉(624m)엘 올랐다.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통일을 이룬 후 무기(武器)를 이 산에 숨겼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한다.


투구 무(鍪), 감출 장(藏)자를 쓰는 무장봉은 평범한 봉우리에 불과한데 그 많은 무기를

어디에 숨겼을까.


산이 깊고 골과 능선이 흘러내렸기에, 저쪽 깊은 골에 숨겼을까.

이후 무기를 다시 꺼냈다는 기록이 비교적 정사(正史)를 많이 다룬 삼국사기나

야사(野史)를 많이 다룬 삼국유사에서도 볼 수 없으니 이곳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런 억새밭 사이로 펼쳐지는 멋진 풍광을 보며 가슴이 쿵쿵거린다.

카메라로 찍어대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내가 시인이라면 멋진 시 한 수를 읊을 텐데 그럴 실력이 없으니 그냥 눈가만 촉촉해진다.


초원은 억새로 늙어간다.

사람도 억새처럼 아름답게 황혼을 맞을 수 있을까.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붙잡고 계절을 거스르는 나무가 추악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겠지.


오래 머물 수 없는 산 정상에 서면 세상사가 참 사소하다.

바람이 나를 밀어낸다.

까마귀도 나를 밀어내며 인간세상으로 빨리 내려가라고 재촉을 한다.


거친 바람을 맞는 성근 세상에 초록이 군데군데 보인다.

혼돈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를 수행자로 만들려는 모양이다.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하는 자연의 풍경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평범한 삶과

행복의 조건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인이 배낭에서 주섬주섬 오징어무침 재료를 꺼내더니 일회용 장갑을 끼고 무치기 시작한다.

산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산까치와 까마귀가 지키던 무장봉이 떠들썩해진다.


넓은 억새밭을 내려다보며 별미(別味)를 먹는 맛이란 그 무엇과 비교를 하랴.


허기져 마신 몇 잔술에 취기가 오른다.

누렇게 펼쳐지는 억새 숲에 겨울바람이 스며든다.


화가는 그림에 취하고 술꾼은 술에 취하며 차(茶)인은 차(茶) 마심에 취하게 되어 있다.

나는 술에 취하고도 풍경에 취하니 풍취인(風醉人) 인가, 아님 한량(閑良)이겠지.


일렁이는 억새 건너로 토함산의 능선이 출렁거리고 하늘에선 까마귀가 뭐 먹을 거 없나 하고

기웃거린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멋진 풍경이 되고, 풍경은 내려다보는 나에게 왠지 모를 한가함을 준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이곳에 머물어 멋진 낙조를 보고 싶다.


정상에서 벗어나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까마귀와 까치 떼가 몰려든다.


한 마리 두 마리가 오더니 금세 수십 마리가 몰려와 빵 부스러기를 먹느라 분주하다.



억새밭을 묵언(默言)으로 걷는다.

나 자신도 억새밭 속의 한 그루 소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억새를 바라보니 그냥 넉넉하고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내가 억새밭을 걷고 있음을 나는 무엇엔가 그냥 감사를 드리고 싶다.


오늘 산행 중에 빼곡한 나무만 보았더라면, 이런 잔잔한 여백(餘白)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내 삶은 탄력을 잃고 바로 시들해졌을 것이다.


                   <      하늘의 이야기


                        하늘로 뻗친 가지 사이로

                        기러기 날라 간 

                        섣달의 하늘은 차기만 한데


                        하늘의 이야기가 이제야 들린다.

                        그리고 나무들의 이야기가 들리기에

                        두 손을 들어 하늘을 휘젓는다.


                        하늘의 소리가 가시면

                        적막한 숲의 소리가 사라지면

                        나 있는 자리에도 찬란한 봄이 오겠지.


                        차가운 바람에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파리가 흔들리고,

                    

                        빛바랜 인연의 시간이 멈추자 

                        텅 빈 산속엔 침묵이 흐르고

                        침잠(沈潛)에 빠진 나는

                        이디로 가야하나.                                     석천   >


먹구름을 뚫고 강한 빛 내림이 시작되더니 슬그머니 부드러워진다.


산길의 방향이 바뀌니 순광에서 역광으로 빛의 경치도 바뀌며 천지창조를 시작한다.

역광으로 보이는 강렬한 경치는 맨눈으로 보기 힘들어 선글라스로 바꿔 쓴다.


바람의 길목에 선 앙상한 참나무가지 위에 살짝 바람이 앉고,

시린 가슴 웅크리고 얼굴에 맞는 겨울바람에 이유 없는 슬픔이 저며 온다.


고왔던 이파리를 다 떠나보낸 참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침묵을 깨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누런 억새무리를 뚫고 뿌리를 내려 푸름을 내뿜는 소나무들이 함께하는 산길의 풍경에

나도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일상에 때 묻고 닳은 자신을 회복한다.


억새 풍경으로 눈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 별미로 위장을 채우고 내려서는 하산 길,

임도가 끝나고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며 다른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16;00

무장봉 산행도 끝나간다.

겨울 산에서는 해가 빨리 떨어지기에 하산을 서두른다.




호전적인 북한, 깡패 같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에 둘러싸인 나라,

대통령은 탄핵을 받아 힘을 잃고 세상은 시끄럽기만 하다.


통일을 이루고 무기를 묻었다는 태종무열왕의 바람이 잠시나마 부러웠다.

이 땅에 전쟁이 없길 바라며 무장봉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16;20

낯선 사람을 보면 요란하게 짖어대는 습관이 있는 까치 한 마리가 논바닥에서 재롱을 핀다.

까치는 한 때 아침에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전령조(傳令鳥)였지.


감이 익으면 높은 곳에 달린 붉은 홍시를 따지 않고 남겨 두었다가 까치가 와서 먹으라고

까치밥으로 남겨 두기도 하지만,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노래를 하면서 설날 하루는 까치에게 나눠줄 정도로

전부터 까치와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살았다.


수확 철 벼를 갉아먹는 곤충을 잡아먹어 좋은 일도 하지만, 까치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새알이나 소형 동물을 먹어 치워 생태계를 파괴하고, 농작물을 마구 먹어치워 익조(益鳥)였던

까치가 유해조수(有害鳥獸)로 바뀌는 과정에 있다.


뇌가 작은 데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알아 볼 정도로 영리한 까치는 사회성도 뛰어나

매나 수리 같은 맹금류가 공격하면 무리를 지어 쫓아내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한 마리를 보면 곧 불행이 찾아오고, 두 마리를 보면 행운이 오고,

세 마리를 보면 딸을, 네 마리는 아들을 얻게 된다.'라는 미신이 존재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해가도 사람들은 미신에 연연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기에 과거 조상의 원시적인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행 들머리에 오방색으로 매달린 산악회 리본과 까치를 바라보며 묘한 상념에 젖는다.


미나리꽝이 한가하다.

이미 수확이 끝난 건지 이 동네는 미나리가 특산이라는데 조용하기만 하다.


17;00

가는 세월에 힘이 부치고 세월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을 때 한없이 무능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가고 오는 세월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수없이 반복되는 게 인생이라 친구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       저녁노을


                          저녁노을이 내리고

                          태양도 서산 아래로 숨는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은 저 저녁노을처럼 또다시 사라지겠지.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시간은

                          그렇게 오고 가고

                          무위의 시간 속에 오늘도 허우적댔구나.


                          인생도 그렇게 왔다가 슬그머니 가고

                          사랑도 언제 했는지 기억도 못하는 사이에

                          후딱 늙어버렸다.


                          가는 세월 잡으려 힘쓰지 말고

                          아쉬워도

                          그냥 고독을 즐기며

                          내일이라는 미망(迷茫)을 품어야겠다.              석천   >


2017.  1.  20.  07;30

동녘하늘이 서서히 붉어지며 온 하늘을 물들인다.

추위 속에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던 대자연에 아침 햇살이 스며든다.


태양이 올라오며 연출하는 장엄하고 상서로운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며,

이 세상 온갖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기를 두 손을 모아 빈다.


09;50

대설주의보답게 함박눈이 내린다.

큰 눈송이는 차창에 부딪쳐 사라지고 땅바닥에는 떨어진 눈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매서운 눈바람이 산을 건너고 나무를 스쳐와 내 몸을 흔든다.

방한복장을 갖추고 차에서 내렸어도 몸은 추위에 떨리고 눈 쌓인 길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를 쓴다.


온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은 한낮의 분위기를 스산하게 만들고

얼굴에 부딪치는 눈송이는 금세 녹지를 않는다.


우레와 같은 바람소리에 기가 질리고 한기(寒氣)로 떨리는 몸에 온기(溫氣)가 언제나 돌려나.

수척한 몸을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세상을 설국(雪國)으로 만들었다.

폭설을 뚫고 달리지만 제 속력을 낼 수가 없다.

근래 보기 드믈 게 많이 오는 눈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젖는다.


스쳐가는 산골마을의 깊은 울림에 정신이 퍼뜩 난다.

눈 덮이는 고택은 눈과 자연의 어울림이다.


시끄러운 세상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산다는 게 늘 그렇듯이 올라갈 때보다는 내려갈 때, 들어갈 때보다는 나올 때,

나설 때보다는 물러설 때, 잡을 때보다는 놓을 때가 중요하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정상에서 모든 것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에 문제가 점점 심각해진다.


병신(丙申)년을 병신(病身)같이 보내느라 전 국민이 병(病)든 몸이 되었지.

정유(丁酉)년에 들어왔어도 여전히 여인들의 국정농단으로 시끄럽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전(以前)보다는 이후(以後)가 아름다워야 사람답게 보이는

법인데 사람들은 그런 평범한 진리를 모른다.


                                                    2017.  1.  20.

                                                             경주 무장봉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