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31.
진눈개비에 이어 새벽엔 눈으로 바뀌더니 세상은 설국이 되었다.
정유년의 마지막 날에도 무위의 자연은 눈(雪)을 통하여 나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해준다.
오늘은 금년의 행위를 마치는 회향(廻向)을 하는 날이다.
창밖의 눈 쌓인 산을 조용히 바라보며 찰나와 같이 사라진 나의 삶을 재조명한다.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백수의 일상에 쫓기며 살아 왔는지,
나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 왔는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지 않고 자리이자(自利利自)만 고집을 하며 살아 왔는지,
나와 가족의 존재를 찾고, 내 주변의 사랑하는 친구와 지인의 존재를 찾으며 회향을 한다.
무릇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소홀한 존재란 없다.
운악산의 만물상에서, 설악산의 만물상에서 세상의 존재 가치를 느낀 거도 잠깐,
망각이라는 세상에서 떠돌다 오늘에서야 나를 되돌아본다.
몇 시간 후면 정유년(丁酉年)이 지나고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이다.
무술년은 천지간지 오행에서 흙(土)을 의미하며 오방색에선 노랑 즉 중앙을 뜻한다.
잠시 창밖의 눈 쌓인 산을 바라보며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는지,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되었는지 멍해진다.
산은 마음 가득했던 욕심과 미움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빈 마음으로 낮은 산을 바라보며 행복이란 신(神)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 허무, 공포, 불안, 우울, 절망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그들 머리 위로 눈 녹은 눈물이 떨어진다.
이 글을 쓰며 내년이면 아니 내일이면 내가 몇 살이지?
나이를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내 신세가 스스로 가여워지고,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내 인생에서 남은 시간을 유추해본다.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고 모든 게 무상(無常)할 뿐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나이고 나의 자아(自我)인데
나, 자아, 나의 것에만 집착을 하면 고통이 생기고, 그것에 집착을 하지 않으면 무아(無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현자(賢者)들은 말 한다.
따라서 인생은 무상(人生無常)이지만 자연 또한 무상(自然無常)이다.
세상의 만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일 년이란 세월이 찰나와 같이 사라졌으니
세월 또한 제행무상(諸行無常)일뿐이다.
새해가 와도 어느 날 보면 또 찰나와 같이 세월이 사라졌겠지만,
오늘만은 나와 나의 가족, 내가 사랑하는 모든 지인의 존재를 생각하며 회향을 하련다.
인연이란 두께는 또 한 켜 두터워지고 세월이라는 무게는 지금도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2017. 12. 31.
정유년 마지막 날 아침
석천 흥만 졸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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