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345 등기로 날아온 청첩장이 준 불편한 진실

김흥만 2018. 3. 13. 22:41


2018.  3.  13.

겨울이 서서히 물러나며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다.

연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겨우내 뜸했던 결혼청첩장이 매일 우편함에

꽂히니 양춘(陽春)이 방래(訪來)하였구나.


로비로 들어서며 미세먼지에 의해 따갑던 눈을 손수건으로 살짝 닦고

우편함을 보니 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함에 붙어있다.


안내서에는 등기우편물인데 집에 수취인이 없다며 재방문 예고와 보관일자가

명시되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나에게 등기우편물이 올 일이 없는데, 혹시 세무서

또는 경찰서인가 자세히 보니 결혼청첩장을 등기로 보낸 거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구지?

손xx, 유xx 배상으로 되어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잠시 머리를 정리한다.

누구일까, 휴대폰 연락처에 등록된 832명의 명단에도 없다.


휴대폰을 여니 모바일 청첩장이 떴고 샤워를 하면서 기억이 난다.

1978년 주택은행 장안동 지점에서 잠시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다.

다른 지점으로 전출이 되면서 40년간 전화통화 한 번 없었는데 느닷없이

일반우편물도 아니고 등기우편물로 청첩장을 보낸 거다.


40년 전 인연이라 얼굴도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데 참 난감하고 한편으론

불쾌하다.

청첩장(請牒狀)이란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남을 초청하는 내용을

적은 글이다.


살다보면 숱한 경조사가 생기는데 요즘 같은 환절기엔 부고장(訃告狀)이

수시로 뜨고, 결혼청첩장은 월 20건 이상이 날아든다.

우리나라의 관습으로 경조사가 생기면 서로 십시일반으로 부조를 해서

큰일을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돕는 미풍양속이 있다.


물론 경조사를 사유로 부정한 돈이나 뇌물 성격이 있는 고액의 부조금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있지만 김영란 법이 시행되면서 많이 정화가

된 것도 사실이다.


부조(扶助)의 행위로 잔칫집이나 상가(喪家) 등 남의 큰일에 돈이나 물건을 보내

도와주거나 몸으로 거들기도 하는데 서로 간 품앗이 성격이 강하다.


얼마 전 동창회 총무로 봉사를 하는 친구가 애로사항을 말한다.

졸업 후 48년간 단 한 번도 동창회 등 모임에 참석이 없었고,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경조사 연락을 받았으니 난감하다고 한다.


물론 총무입장에서는 일단 연락을 받았으면 이를 전체 공지하는 게 옳다.

나는 동창회 비용이 수반되는 화환이나 조화는 보내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수십 년간 나타나지 않았으면 경조사가 끝난 후에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다.


요즘엔 가족 친지만 초대하여 치루는 작은 결혼식이 점차 늘어난다.

일반우편물로 청첩장이 왔다면 아련한 옛 추억을 꺼내 부조(扶助)라도 하겠지만,

등기우편물로 송달된 청첩장은 왠지 세무서에서 보낸 세금고지서와 경찰서의

소환장 같은 불쾌한 생각이 들어 개봉도 하지 않고 휴지통으로 내던진다.


황혼의 나이가 되어서도 잡다한 일에 신경이 쓰이니 해탈(解脫)하긴 틀린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고희(古稀)가 되면 종심(從心)이라 청첩에서 자유로워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대범하게 살아야 하는데 강요된 청첩장을 받는 불편한 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작아지는 내 모습이 오늘은 싫다. 


                                                2018.  3.  13.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