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7. 04;30 백두산 여행 첫날
인적이 끊어진 길가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가뭄 속에 내리는 '일비'는 여행에 대한 축복일까.
텅 비었던 버스정류장에 여행복장을 한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사람들은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함을 감추지
않는다.
05;30
대한민국의 수도임에도 한강하구의 모래톱에 윤형철조망으로 세운 철책과
경계초소는 휴전과 분단국임을 실감나게 한다.
전쟁소설에선 한강하구가 북한군의 침투지가 되어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는데
문득 내가 근무했던 21사단 DMZ의 철책선이 생각난다.
해무(海霧)사이로 작은 섬들이 아스라이 보이고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차량들은 빗줄기속에 물보라를 꼬리에 달고 공항을 향해 질주를 한다.
차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포물선을 그린다.
오늘은 직선보다 포물선이 더 아름다우니 여행으로 설렘이 가득찼다.
엷은 안개 속으로 보이는 경치는 보일듯 말듯하고 잠시 정적명상(靜的冥想)을
하였나 보다.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은 또 다른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숨은 풍경은
그리움을 준다.
06;20
잠들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켜고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목적지인 인천공항이 가까워지는가 보다.
인천공항행 버스는 정확히 6시 20분에 도착한다.
4년 만에 다시 찾아가는 백두산이라, 이번이 4번째인가.
3번째 서파에서 백두산에 오르며 다시는 못 올 곳이라 생각하고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천지에서 내려왔는데,
천지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남았기에, 아스라한 그리움의 불씨가 다시 백두산을
향하게 한다.
06;40
여행은 설렘이다.
여행은 다리가 성성할 때 떠나야 한다.
여행은 마음 떨릴 때 떠나야하며 다리가 떨리면 나서지를 못한다.
거창한 목적과 목표를 가진 여행은 부담스럽기에 마음이 설레고 다리가 성하면
그냥 부담없이 떠나는 거다.
2018년 4월초 안면도 해변 길을 걸으며 친구들의 걷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백두산 여행을 2020년에서 2019년으로 1년을 당겨 추진을 했는데, 어느새 13개월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너무 축복이라 생각했다.
경제도 인터넷도 손흥민이 활약하는 축구 등 스포츠도 모든 게 자랑스러웠다.
어려서 보릿고개와 4·19, 5·16을 거쳐 베트남전이 끝날 무렵 육군에 입대해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며 꿈을 키워왔고,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큰 대과 없이 마무리하고 황혼의 삶을 살면서도 불행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를 않았다.
출국수속을 하다가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50명이 넘는 단체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한 친구의 여권이 문제가 된다.
구 여권 만료일자가 아슬아슬해 새 여권으로 제출하였는데, 구 여권으로 단체비자가
발행되는 불상사가 생겨 끝내 동행을 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출발부터 순탄치 못하니 어떤 어려움이 또 생길지 걱정이 앞선다.
내 자리는 비상구 26A 자리라 승무원에게 비상탈출 교육을 받는다.
비상탈출 시에는 승무원의 지시를 받아 탈출구를 열고 제일 먼저 슬라이딩을 한 후
승객구출에 최대한 협조를 하여야 하는 자리이다.
09;00
무심한 비행기는 중국 대련을 향해 빗물을 헤치고 사뿐히 하늘로 비상한다.
09;50
비행기가 마구 흔들려도 착륙을 시도하는데 전후좌우로 기체가 요동을 친다.
땅에 바퀴가 닿는다싶더니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기수가 땅바닥에 박을 거 같이
흔들리다가 하늘로 상승한다.
20여 분간 하늘을 빙빙 돌다 다시 랜딩(landing)을 시도한다.
강풍과 난기류로 승객 여러 사람이 토하고 몸이 마구 흔들려 메모를 할 수가 없다.
삼십 여분 째 찬스를 노리는데 무사히 착륙을 할 수 있을까.
두번 째도 랜딩에 실패를 하더니 강풍으로 착륙을 할 수 없다는 안내멘트가 나오고
다시 바다쪽을 향해 재상승을 한다.
기종이 A321-200 에어버스 176인승이라 점보기보다는 랜딩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문득 티블런스 등 항공기 재난사고에 관한 영화가 떠오르고, 예전 프랑스에 가며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 장가계에 갈 때 난기류에 휘말려 비행기가 뚝 떨어지며 요동을
쳐 겁에 질렸던 생각이 나지만 노련한 기장을 믿어야겠지.
10;00
인천공항으로 회항(回航)을 한다는 멘트가 나온다.
50명이나 되는 일행인데 참 난감하다 어이할까.
12;15
오후 2시에 재출발한다고 하는데 바람은 다소 잦아들었고 빗줄기도 약해졌다.
15;00
대련공항에 무사히 착륙을 했다.
50명이 4박 5일간 버스로 33시간을 타고 장장 2,300km의 백두산 대장정이 시작된다.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의 동북삼성이라, 만주벌과 북간도, 서간도는 한국의
2.5배나 된다는 설명을 들으며 이국(異國)의 풍경을 바라본다.
15;55
입국수속은 별로 지체되지 않고 여행사 직원을 만난다.
아시아 최대규모라는 성해광장에 도착한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4배에 달하는 176만㎡로 약 50만평 정도 되는 크기를
자랑하는데 현대화된 모습이라 특징이 없다.
우리나라는 반도라지만 실제로는 섬(島)이나 마찬가지이다.
삼면(三面)이 바다이고 위로는 북한으로 막혀있으니 사실상 섬이 아닌가.
섬나라 사람들은 다소 편협하다고 한다.
대륙의 웅혼(雄魂)한 기질을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는데 그래도 일본인보다는 낫다.
가끔은 우리나라의 인구에 대해 생각을 한다.
70~8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자라던 구호는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에게 인구절벽이라는 재앙을 던져주었는데, 15억 명이 넘는 많은 인구의 중국에는
축복을 주었다.
여행이란 여행지의 전통과 역사적인 옛모습이 남아있어야 볼 맛이 난다.
너무 현대화된 모습은 쉽게 식상하기에 메모를 하지 않는다.
도시는 이미 현대화 되었고 일부는 서울보다 앞섰다고 하는 요령성 대련의 성해광장과
거대한 도시의 용트림에서 역동적인 모습이 보인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우리의 현실은 암담한데, 지나는 중국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밝다.
중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지만 이 나라에는 희망이 있다는 걸 느낀다.
17;00
차창으로 스치는 비사성(卑沙城),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는 대화상산은 험악한 골격을 보여준다.
특이한 암봉으로 그냥 지나치려다 줌(Zoom)으로 당긴다.
나무가 없는 저 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우리 고구려의 땅과 성(城)이 지금은 중국 땅으로 되었다.
동북삼성까지 가졌던 거대한 고구려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남쪽의 변방에
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다는 역사의 대목에선 항상 아쉽기만 하다.
태양빛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바위들, 그 황량한 풍경 속에 서지 못함이 아쉽다.
산이 속내를 보여주고, 나는 비사성 역사의 뒤안길을 찾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천리장성의 시발점이 되는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이 다허상산(大和尙山)꼭대기에서
빛난다.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다는 천연 요새인 비사성,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에 이르기 위해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요충지였다고 한다.
2차례의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중국 수나라 양제는 서기 614년 3번째로 공격을 감행하여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으로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그 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 원정에 나설 때 비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때 남녀 8,000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역사를 남겼다.
대련시내를 벗어나자 중국농촌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탄 버스는 가도 가도 산은커녕 언덕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륙을 질주한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낙후지역이 보이는데,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낙후되었다는 설명을 듣는다.
18;39
상서로운 무지개가 떴다.
색깔의 순서가 '보남파초노주빨'이 맞는지 '빨주노초파남보'가 맞는지 모르겠다.
단지 나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뭉치는 역할을 하는 다리라는 생각이 든다.
저 무지개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우리에게 어떤 행운을 주려나.
여행이란 삶의 여백(餘白)을 만나는 거다.
숙소인 단동까지 4시간이 걸린다는데,
여행의 설렘은 4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해주고 삶의 여백을 채워준다.
2019. 5. 27. 여행 첫날 대련에서 단동으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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