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479 파주 심학산(尋鶴山 194m)의 직장연

김흥만 2019. 8. 28. 10:44


2019.  8.  23.

새벽기온이 22도까지 떨어졌다.

냉수샤워를 하기엔 부담스러워 온수로 샤워를 한다.


10;14  심학산 입구

세상이 온통 찜통 속에 들어있는 거 같은 무더위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

그래도 입추(入秋)가 지나고 처서(處暑)가 되니 교앙(驕昻)하던 매미 울음소리도

거짓말같이 기세가 꺾였다.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 산들바람 불어오는 태고의 적막 속으로 들어가기 전 포즈를

취하지만 배낭 속 얼음생수통과 가까이 있던 카메라 렌즈의 김 서림이 생각보다 오래가

빛바랜 사진이 된다.


자산규모가 400조에 가까운 메가뱅크(Mega bank) KB금융의 수장(首長)인 은행장을

역임한 민병덕 전임행장과 지점장들과의 인연은 꽤나 오래 지속된다. 


우연(偶然)이 '예기치 않게 일어난 것'이라면 필연(必然)은 '반드시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데,

은퇴 후 10년 세월이 흘렀어도 꾸준히 만나니 우리의 인연은 우연(偶然)이 아닌 필연(必然)의

인연인 모양이다.


산들바람이 분다.

자연은 생육성쇠(生育盛衰)라는 4단계로 변한다.

변하는 과정 중 성(盛)에 해당하는 여름의 절기에서 처서(處暑)가 되자 초록이 조금씩

힘이 빠지고 지쳐간다.


계절이 서서히 바뀌는 과정의 숲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들이 마음을 울린다.

귀뚜라미와 미물(微物)들의 울림이라,

절명(絶命)하듯 미치게 울어대는 매미와 풀벌레들이 주는 울림은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긴다.


유치원생 아기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기들의 목소리 성역(聲域)은 신비로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람들은 세상의 삼대인연으로 흔히들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을 꼽는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은 직장연(職場緣)도 있다.


30년을 넘게 한 직장에서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는 7가지 감정을 가지고

같은 동료로서 생활을 하면 은퇴를 하였어도 삼대인연 못지않게 계속 정을 나눌 수 있다.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 욕심이라는 인간 본연의 본성을 생각해본다.


10;31

접적지역이라 산의 군데 군데가 교통호와 벙커로 준요새(準要塞)가 되었다.

벙커 앞에 서니 문득 두려움이 없을 만큼 패기(覇氣)가 넘치고 열정으로 세상과

당당하게 맞서던 청춘시절이 생각난다.


삶이란 참 복잡하고 아슬아슬하다.

부족하지만 젊은 시절의 꿈을 이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니 황혼의

여유나 즐겨야겠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계곡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처서(處暑)는 가을이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24절기 중의 하나이다.


엊그제까지 더위에 허덕였는데 자연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오늘 햇볕은 따갑지만

숲의 바람골엔 시원한 선들바람이 불어 뜨거워진 몸을 식혀준다.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와 친구의 중요성을 안다고 한다.

권력과 재산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는 영원하지 않다.


사람과 같은 사회적 동물에게 친구의 중요성이란 절대적이다.

나의 친구는 얼마나 될까.

옥스퍼드 대학교 로빈 던바 교수가 친구를 150명 정도는 가질 수 있지만 언제나 내 편을

들어줄 '절친'은 5명을 넘지 못한다는 주장을 쓴 글을 본 기억이 난다.


며칠전 폰의 연락처에서 294개를 지웠더니 폰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매년말마다 카톡의 연락처는 지웠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도 지우지 않았던

폰의 연락처 중 011, 016으로 남은 폰 번호를 다 삭제한 거다.


11;00

심학산(尋鶴山)은 해발 194m로 낮은 산이다.

그래도 파주의 평야지대를 달리다 보면 한가운데 우뚝 솟아 제법 높아 보인다.

6.8km의 둘레 길을 걷다보면 제법 많은 땀을 흘리리라.


원래 심악산(深岳山)이라 불리다가 조선 숙종 때 궁궐에서 도망 나온 두 마리의 학(鶴)을

이곳에서 찾았다 하여 심학산(尋鶴山)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심학산의 정자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한참을 걷다보니 조망처가 나온다.

금대봉 고목나무샘에서 시원(始原)하고,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장장 514km를

달려온 한강물이 서해바다와 합류하려 한다.


모든 물줄기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다.

그 끝에 다다르면 결국 바다에서 하나가 된다.




유장한 한강의 끝을 보면서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인생의 끝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멈춰 하늘을 보니 세상은 높고 넓고 깊어지는데 유독 북한 땅만은 아득해 보인다.


너덜길도 없고 가파른 언덕도 없는 산길에서 큰 바위를 처음 만난다.

산자락에 약천사라는 천년사찰이 있기에 혹시나 마애불(磨崖佛)이 있을까 자세히 봐도

음각(陰刻)이나 양각(陽刻)의 흔적이 없다.


경주 남산이라면 이 정도의 바위에는 으레껏 음각, 양각 등 여러 기법을 동원한

마애불을 남겨 후세에 전했는데 조금은 아쉽다.


예술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인 인간관계에선 어느 정도 여백(餘白)의 미가 있어야 서로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다.


초록이 묻어나는 자연에서도 여백의 미(美)는 필요하다.

산속이 100% 초록으로 꽉 차면 금세 질릴 텐데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바위는 다행히

이 산속에서 여백의 미를 완성하는 거다.


산모기가 내 팔뚝을 물려다가 사라진다.

처서라 산모기도 입이 비뚤어진 모양이다.


12;55

약천사가 나온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니 참으로 명당자리에 자리 잡았다.

심학산에서 화기(火氣)가 나오고 저 아래 한강에서 수기(水氣)가 나오니

불과 물의 절묘한 배합이로다.


사람이 산에서 화기를 받으면 에너지가 많이 들어와 여유가 생기기에 인자요산

(仁者樂山)이요, 물을 좋아하면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각박하고 여유가 없어지는데, 이때 물을 가까이 하면 조급증과

과열되는 증상이 줄어들기에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으니 딱 그 말이 맞는지

약천사에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약천사(藥泉寺)의 13m 짜리 거대한 '통일대불'에 매미가 붙었다.

매미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남북통일약사여래불'은 저 큰 귀를 통해 들으려나,

어쩌면 한강 끝자락에 살짝 펼쳐진 북한 땅의 신음소리를 듣는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창건한 약천사니 여기 또한 천년사찰이다.

본래 이름은 법성사였다는데 사찰명을 지장보살을 상징하는 약(藥)과 법당 앞에서

솟아나 질병을 치료해주는 약수(藥水)와 샘(泉)을 따서 약천사로 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대부분 사찰의 배열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산신각을 짓고 밑으로 대웅전을 배열하는데

약천사는 특이하게 산신각의 위치에 대웅전을 배치하였다.


아마도 사찰을 창건할 때 산신이나 귀신의 간섭이 없었나 보다.


약사여래부처는 왼손에 약함(藥函)을 오른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다.

'열두 가지 서원을 세워 중생의 질병을 구하고 재액과 환난을 소멸하여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부처님'을 바라보며


요즘 문대통령과 일본, 법무장관으로 지명된 조국이라는 사람으로 나라 전체가 시끄럽고

위기를 느끼는데 부처님의 법력으로 깨끗하게 소멸시켜주고, 세상의 고뇌(苦惱)를 없애

달라고 마음속으로 빈다.


스님들의 고결한 독경소리도, 처마밑의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소리에 화들짝 놀란 잠자리가 하늘 높이 사라진다.



소나기 소식이 있었는데 그냥 사라진 모양이다.

'처서(處暑)에 비가 오면 십리에 천석을 감하고 백로(白露)에 비가 오면 백석을 감한다'할

정도로 지금 비가 오면 농사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은근히 날씨 걱정이 크다.

오늘이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우그러져 풀도 울며 돌아가겠지.


예전엔 처서가 지나면 농부는 논두렁의 풀을 깎고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였으며,

선비는 장마에 젖은 옷 등을 음지에서 말리는 음건(陰乾)과 책을 바람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했다고 하니 나도 서재의 문을 활짝 열고 포쇄를 하여야겠다.



절밥을 먹는 고양이가 땡볕 내려쬐는 마당을 가로질러 법당쪽으로 뛰어간다.

천왕문, 일주문이나 해탈문같이 불교를 상징하는 문이 없는 약천사를 벗어난다. 


13;10

나이가 들면 들수록, 조직에서 벗어난 기간이 길면 길수록 외로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고독이 두려워 여러 친구를 유지하려 애쓴다.


친구란 외로움을 대비한 보험일까.

정말 친구란 소중한 존재일까.

친구가 없는 내 삶이란 얼마나 초라해질까.


인연엔 저마다의 수명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어질 친구는 이어지고 멀어질 친구는 멀어진다는 무력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날 선 말로 다툴 일도 없고 생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이는

수명이 길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서 멀어지면 점점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외로워지기 싫다는 이기심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건 이어지는 인연으로

고독에 대한 보험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으로 살면서 언젠가는 혼자인 순간이 오겠지만, 앞으로도 긴 인생이 남았기에

소중한 인연은 계속 이어가고 싶다.


산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법,


거기에다 당간지주와 일주문, 해탈문이 없는 약천사에서 일상의 무게를 내던지고

너그러운 마음을 찾았으니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되었다.


     

                                                    2019.  8.  23.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