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513 나도 세배(歲拜)를 하고 싶다.

김흥만 2020. 1. 20. 19:48


2020.  1.  19.  10;00

기다리던 함박눈이 내린다.

옛 어르신들은 정초에 함박눈이 내리면 상서로운 서설(瑞雪)이라 했다.


극심한 가뭄 속에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세상을 금세 설국(雪國)으로

만든다.

오늘이 며칠이지?

양력으로 따지면 세초(歲初)인데, 며칠 후면 설날이라 음력으로 따져

세밑이다.


어렸을 때 누군가 나에게 설날과 추석 중 어느 명절이 좋으냐고 물었다.

엄마와 아빠 둘 중 누가 좋으냐고 묻는 우문(愚問)같아도 나는 설날이

좋다고 분명히 답을 하였다.


답은 간단하다.

추석은 과일 등 먹을 게 풍부하지만 설날이란 세뱃돈으로 용돈을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명절이기 때문이다.

카렌다를 보며 어려서 맞이하던 설날, 1년에 한번 세뱃돈을 벌었던 날이

그리워진다.


동네 어르신에게 세배를 하면 당시 10환 정도를 세뱃돈으로 받았다.

내가 10살 되던 해 1962년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는데 1/10로 화폐단위절하

(redenomination)가 단행되어 100환은 10원이 되고, 10환은 1원으로

바뀌었지.


우리 꼬마들 사회에선 동네 어느 어르신 세뱃돈이 후하고 짠지 서로

정보가 공유되어 후한 어르신 집에 먼저 들리려고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나는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배를 한 후 재빨리 향교 옆'반씨 어르신'

댁엘 제일 먼저 들렸다.


딸만 8명인 집안이라 나를 수양아들로 생각하고, 세배를 가면 남들보다

10배나 되는 세뱃돈을 챙겨주시기도 했지만, 특히 장날 장터를 오고갈 때

우리 집에 들려 아들로 생각하는 나에게 용돈을 주고 가시던 아저씨 내외가

문득 그리워진다.


먼 훗날 두 분이 별세를 하고, 제사상에 술잔을 올리면서 그분들의 정을

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는데,

이젠 내가 세배드릴 기회도 사라졌고, 내가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주는

세대가 되었다.


은행 초년 시절 해마다 설날이 되면 지점장 댁에서 음식을 차리고 전 직원을

불러 세배와 함께 덕담을 곁들인 술잔을 나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분도 계셨지만 대부분 지점장들은 직원들이 먹을 설날

음식준비에 인색하지 않았다.


서서히 시간이 흘러 점차 그 풍습은 사라지고, IMF외환위기가 와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수천 명씩 은행에서 퇴출당하는 아픔이 생기자 설날 세배풍습은

자연스럽게 먼 옛날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아기들에게 세뱃돈을 받으면 어디에 쓸 건가를 물으니, 큰놈은 친구들이랑

떡볶이도 사먹으며 놀겠다하고 작은 놈은 저축을 하겠다고 한다.

아직 돈에 대하여 잘 모르는 아기들에게 어느 게 맞는 정답일지 몰라

그냥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아기들이 내 말뜻을 이해하려나.


이 나이가 됐어도 세배를 드릴 데가 있으면 좋겠다.

진천에 내려간다면 몇몇 친구들의 100세 가까운 노모(老母)에게 세배를 드리러

가련만 이젠 고향에 남은 형제가 없어 가지 못하는 신세라 꿈속에서나마

세배를 드려야겠다.


한참을 내린 함박눈은 차들을 엉금엉금 기어가게 만들고,

뜰에선 눈사람을 만드는 아기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세상을 살맛나게 한다.


                                                               2020.  1.  19.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