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5. 17;30
광명 방향 7호선 전철 안은 퇴근시간과 겹쳐 혼잡해도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설렘이 그득하다.
새해 연초부터 옛 동료직원이 승진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한잔하자는 연락은
나를 들뜨게 만든다.
무릇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욕망은 무엇일까.
식욕(食慾), 성욕(性慾), 재물욕(財物慾)인가,
누구나 기준은 다르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건강, 돈복과 함께 장수(長壽)를
꼽는데 나는 명예를 추가하고 싶다.
직장인에게 명예란 물론 도덕성을 겸비해야겠지만 상위직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즉 승진(昇進)이라고 생각한다.
진급을 하면 그 직책에 걸맞게 책임과 권한이 부여되고 신분상승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먼 옛날 어렵게 책임자 임용시험에 합격한 후 대리, 차장까지는 순탄하게
진급을 하였는데 부지점장 승진에 탈락된 거 같다는 모부행장의 전화 한 통에
낙담(落膽)하고 휴가원을 작성한다.
이참에 지리산을 종주하며 마음이나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산행에 필요한
장비와 물품을 준비하던 중 인사담당 부행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부지점장 승진을 축하한다."는 축하전화 한마디에 영업을 하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간다.
이후 IMF외환위기가 닥쳐오고 3,800여명의 직원이 명예퇴직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대학살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은행에선 한 푼이라도 외채를 갚기 위해 방송국과 공동으로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전 국민의 자발적 '금 모으기'라는 특별행사를 진행한다.
금 모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내세울 스펙이 없어도 동남은행 방이동지점
인수팀장을 거쳐 영등포역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으니 배경(背景)없는 흙수저
출신으로 출세를 한 셈이지.
이번에 승진한 여직원은 계약직으로 은행에 들어와 20년 인고(忍苦)의 세월을
거쳐 진급하였으니 남달리 감회가 새롭겠다.
10년 전 아들이 지금의 며느리를 소개한다.
농협에 계약직으로 입사하였다가 정직원 시험에 합격하여 정규직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하고 결혼에 찬성을 하였지.
지금이야 많이 평준화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계약직 직원은 정규직 직원에 비해서
처우가 매우 열악하였는데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도외시(度外視)하고
급여, 상여금, 보로금, 심지어는 건강진단까지 차별화되어 설움을 많이 겪었다.
오늘 옛 동료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말이 많아지면 '꼰대라떼'라는 말을 들을 테니 말을 아껴야겠지.
요즘 '꼰대라떼'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꼰대라는 말은 '나이가 많이 든 사람' 또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비하하여 사용하는
일종의 은어라고 한다.
최근 꼰대라는 말이 조금 더 확장되어 기성세대 중 자신의 경험만이 옳다고 믿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주입하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자신의 경험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나 때는 말이야"라며 자신의 무용담을
말하는 사람을 '커피 라떼'를 본 따 꼰대라떼라는 표현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하는 거다.
요약하면 <고집이 센, 말이 안 통하는, 권위적인, 보수성향의, 참견하기 좋아하는,
옛날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도 해당된다.
19;00
약속시간이 되자 8명이 모인다.
술 한 잔을 하며 지점장인 나를 '산적두목'이라고 불렀던 옛 동료직원들과의 인연을
생각한다.
누군가 이런 인연을 억겁의 인연이라 했다.
눈 깜짝할 사이를 75분의 1초, 즉 0.013초인 찰나(刹那)와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시간인 탄지(彈指),
그리고 숨 한번 쉬는 시간인 순식간(瞬息間)을 뛰어넘어 억겁(億劫)의 인연이라,
억겁을 시간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
힌두교에서는 43억2천만년을 한겁이라 하는데 억겁의 인연이란 계산하기도 벅찬
놀라운 인연이다.
은퇴한지 10년이 넘는데도 소중한 인연을 꾸준히 이어주는 옛 동료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옛 추억을 음미(吟味)한다.
23;00
골목길에 접어들자 목덜미를 스치는 찬바람에 취기는 사라지고,
한기(寒氣)를 뿜어내는 하현(下弦)달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준다.
누군가는 승진의 기쁨을 누리고,
또 누군가는 탈락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밤,
이지러지는 달을 바라보며 심근경색으로 고생을 한 팀장과 직원 모두의 안위를
간절히 빈다.
2020. 1. 15.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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