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516 화안시(和顔施)가 좋은 날

김흥만 2020. 1. 25. 12:32


2020.  1.  23. 08;00

늘 오르는 산길,

마음에 어지러운 일이 있든 없던 늘 걷는 산길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입구에 아치형 문이 생겼고, 조금만 오르면 흔들의자와 고정의자도

배치를 하였으니 바야흐로 선거철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사랑을 나누는  연리목(連理木)을 신목(神木)으로

삼고자 누군가 돌을 조금씩 쌓기 시작했고 서낭당이 생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돌더미는 말끔히 치워지고 그 자리에 '죽목훼손금지'라는 팻말을

세웠다.


서낭당 신목 앞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고 하는 서낭신앙을 가진 무속인들이 이 산의 당산나무에

청·홍·백·황·녹색 등 오색 비단 헝겊을 걸면 금세 산이 지저분해질까봐 

미리 치웠을까.


허긴 대형교회의 거대한 십자가가 빤히 보이는 곳에 선 연리목이라도

비보풍수물(裨補風水物)인 당산나무를 그냥 놔둘 수가 없었겠지.


목(竹木)이라,

죽목은 대(竹)와 나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곳엔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책상물림 공무원이 현장을 보지 않고 그냥 작업을 지시한 모양이라

죽목이라는 단어를 수목(樹木)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내야겠다.


그래도 작년 봄 누군가에 의해 '미선나무'가 훼손되어 속이 상했는데 이런

팻말이라도 세웠으니 덜 훼손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어 오늘은 좋은

날이다.


10;00

요즘 대형병원들의 서비스가 많이 좋아졌다.

새벽부터 오늘 채혈과 심전도 검사가 있다고 강동성심병원에서 전송하는

알림 메시지가 폰에서 요란하게 울린다.


심전도 검사실 대기석은 예약자들로 많이 혼잡하고, 아기가 링거를 매달고

침대에 누워 도착한다.

담당 직원이 아기가 급해 순서에 관계없이 검사를 진행하겠다며 다음

대기자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러자 노인들이 이의 제기 없이 아기가 우선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새록새록 잠든 아기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는

자비로운 모습은 불교의 잡보장경에 나오는 무재칠시(無財七施) 중

화안시(和顔施)로다.


엊그제 임산부가 이상이 생겨 경찰차로 급히 후송을 하자 모세의 '갈릴리'

바다가 갈라지듯 차량들의 양보로 1시간 거리를 15분 만에 도착해 산모와

아기를 무사히 치료하였다는 뉴스는 양보하는 보시인 상좌시(床座施)를

연상하게 한다.


심장검사를 끝내고 길거리에 나오니 선물상자를 들고 다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온화하고 매우 밝으니 이 또한 화안시(和顔施)라 경기가 어려워도

설 명절은 누구나 다 좋은 날인 모양이다.


11;00

당구장에 들어서자 믹스커피의 향이 내 코를 간질이고, 목구멍으로 커피 한

모금이 들어가자 뱃속이 금세 훈훈해진다.

후각과 청각이 유난히 예민한 나는 커피 향을 즐기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음미(吟味)하는 거다.


친구가 당구장 문을 열고 수다를 떨며 들어오고,

홀짝홀짝 한 모금씩 마시는 따끈한 커피는 쩝쩝대는 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소리로 변한다.

커피로 입안에 당분이 많아져 냉수로 입가심을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병원에서 훈훈했던 감정이 이어지니 오늘은 좋은 날이다.


며칠 전엔 겨울비가 내려 빗소리가 좋았고,

4일전엔 함박눈이 소리를 내지 않고 펄펄 내려 좋았고, 

오늘 새벽엔 숲속에 숨었던 바람이 슬그머니 튀어나와 윙윙대는 소리가 좋았다. 


특히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땀이 안 나서 좋고 막걸리를 마시며 꿀꺽거리는

소리도 듣기 좋다.

막걸리 내기에 졌어도 술 마시는 소리와 담소하는 분위기가 좋으니 나야말로

매일 매일이 좋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의 수혜자로다.


17;00

옛 동료인 영등포 직원이 보낸 한우세트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제법 묵직해

두 손으로 옮긴다.


옛 동료들과의 20년 넘게 이어지는 인연과 은퇴한 12년 세월의 무게가 함께 쌓여

무거운 모양이라,

오늘이야말로 복 받은 백수의 참 좋은 날인 모양이다.


                                                       2020.  1.  23.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