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8. 09;40
슬며시 다가왔던 봄이 아쉬워할 사이도 없이 사라지고, 여름이 한창
익어가더니 어느새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옷을 입을 새도 없이 닥쳐온 가을 추위가 따뜻한 겨울옷을 입게
하였으니 겨울은 갑자기 닥쳐온다고 표현해야겠다.
봄이 생명의 탄생으로 인한 환희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요,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孕胎)하려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대자연,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칙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불변의
진리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계절의 변화를 만드는구나.
제야의 종소리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월 하순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계없이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점점 깊어가는
가을의 어느날 나는 양주 불곡산을 오른다.
우리나라엔 산명(山名)이 같은 산이 참 많다.
분당의 불곡산을 오른 지 수년 되었고, 양주의 불곡산은 처음 오른다.
지난달 불곡산을 목표로 하였으나 예정과 달리 천보산과 칠봉산을 올랐으니
오늘은 불곡산을 제대로 올라야겠다.
산의 시간은 도시의 시간과 다르다.
낙엽 지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산길의 고즈넉한
풍경에 잔뜩 움츠렸던 마음이 풀어진다.
어디선가 탕! 하는 단발 총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자동으로 연사(連射)를
한다.
양주는 DMZ지역이 아니고 전투지역전단(戰鬪地域前端)인 FEBA 지역에
속하는데 이 근처에 군부대 사격훈련장이 있는가 보다.
병사들이 어떤 소총을 쏠까.
저 소리는 기본화기인 K2 소리인가.
나는 훈련소에서 M1, 자대에선 M2 Carbin 소총을 지급받았기에
그 소리에 익숙하지만 저 소리는 익숙하지 않다.
M1, Carbin, M16, M16A1은 사라진 지 오래고 요즘 병사들은 K1, K2
소총을 개인 지급받는다.
최근 총기시장에 아름다운 반란이 일어났다.
메이저급 생산업체를 제치고 '다산기공'이라는 중소업체에서 만든
DSAR-15P가 특전사 장병들의 개인화기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40년을 사용하였던 K1A를 대체하게 된다는데, 내가 군인은 아니지만
그동안 OEM으로 AK47, 권총, 저격용 소총을 만들었던 다산기공의 제식명
K16(가칭)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총열의 기준수명이 1만 2천발인데 다산기공의 소총은 2만 발 이상을 쏴도
지장이 없고 작은 반동만 느낀다니 엄청난 총기임엔 틀림없겠다.
미국· 유럽도 인정한 초정밀가공 기술로 만든 권총, 저격용 소총이 명품
반열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고, 이미 여러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코로나로 우울했던 기분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불곡산이라, 분당에도 있는 불곡산이 여기 양주에도 있다.
부처와 관계있는 이름일까.
얼마 전 국토지리정보원이 집계한 산 이름 중 '남산'이 101개로 가장 많았고,
봉우리는 국사봉(國師峰)이 80개로 제일 많다고 한다.
이밖에도 동네 이름으로는 '새터'가 273개, '절골'이 142개, '새말'이 110개,
'안골' 96개, '큰골 68개, '뒷골' 66개라고 발표를 하였다.
양주의 진산(眞山)인 불곡산,
지난달에는 천보산과 세조가 올랐다 해서 어등산(御登山)으로 불리기도 하는
칠봉산에 올랐다.
임꺽정의 전설이 흐르는 불곡산,
기암들로 오밀조밀한 산세를 자랑하는 불곡산을 오른다.
불국산(佛國山)으로도 불리는 불곡산의 산명은 부처가 사는 세계인 불국토를
의미한다.
자살(自殺)을 방지하고자 하는 안내문이 소나무에 걸렸다.
살다 보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연과 인연들,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순간들이 하나씩 하나씩 의미를 갖고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매일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마음이 복잡할 때 오르는 산,
도시의 시간이 숨 가쁘게 달려간다면 산속의 시간은 오히려 더디다.
10;50
동행하는 친구들의 거친 숨소리를 듣는다.
종심을 바라보는 나이라 새삼스럽게 옆에 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걸 느낀다.
단풍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이 산이 가진 골격을 보여준다.
가을 가뭄으로 마른 흙들이 스치는 바람과 내 등산화에 짓밟히더니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황량한 풍경으로 서서히 바뀌는 지금,
산이 속내를 온전하게 보여주려 변하는 과정이겠지.
세상은 희대의 역수(逆豎)와 괴상한 요비(妖婢)가 힘을 합치고,
유능한 사냥개로 불리며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칼잡이 검찰총장과
서로 물어뜯으며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국민을 괴롭힌다.
어찌 보면 일반 백성인 장삼이사(張三李四)는 권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눈이 좋지 않으니 세상의 더러운 꼴을 안 보면 되겠지만,
청력 지수가 18로 나와 웬만한 작은 소리도 들리니 간신들의 소리로 더럽혀진
귀를 자연의 소리로 세이(洗耳)를 해야겠다.
전쟁영화 "씬 레드 라인"에서 주인공은 "우리는 천국으로 간다. 살아서 지옥에
있었으니까"라고 말하고,
가수 나훈아는 "테스 형 세상이 왜이래♬"라며 절규를 한다.
사실 지금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마스크 없이는 살 수 없는 지옥이요,
온갖 간신이 날뛰니 눈과 귀를 닫아야만 하는 지옥이다.
언제 다시 평범했던 일상을 되찾고, 평화로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이 또한 우리들의 당면한 숙제가 아닌가.
철모르고 핀 '진달래' 한 송이를 찍다 보니 일행은 저만치 사라졌다.
수백 년 전 희암사를 중창한 '나옹선사'가 걸었을 산길에서 나 홀로
요요적적(寥寥寂寂)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무 틈 사이로 듬성듬성 피어 하늘거리는 억새를 보며 잠시 적적하고
고요한 상태를 즐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산 같이 물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는
나옹선사의 시(詩)를 흥얼거리던 중 정상인 상봉의 거친 암봉이 내 시야를
압도한다.
11;09
하늘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평온하고 구름이 듬성듬성 떠서
북쪽 하늘로 흘러간다.
갑자기 저 하늘에 변화가 일어났다.
꽝하는 음속돌파 소리(Sonic boom)와 함께 전투기 두 대가 파란 하늘에
선을 긋듯 하얀 항적을 그리더니 서쪽하늘로 사라진다.
너무 멀어 기종을 확인하기 어려운데 아마도 F16 두 대가 스크램블(Scramble)
한 건 아니고 초계비행을 하는가 보다.
총소리도 그치고 비행기 소리도 사라진 고요한 적막을 소슬바람과 까마귀가
깨고 허공을 가른다.
가끔은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산속에서 이렇게 고독을 누리는 거도
괜찮다.
자연의 거친 매력을 보며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생각해본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와 기사에 "사람이 어쩌면 저리도 뻔뻔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많다.
전·현직 법무장관이 자식을 낳았으니 자식 못 낳은 죄인이 가는 흑암지옥에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오역죄(五逆罪)를 저지르고,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因果)를 무시하는 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으니 사후(死後) 아비지옥
(阿鼻地獄)에 떨어지지 않겠나.
요즘 역수와 요비는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린다는 수석침류(漱石枕流)를 범한다.
여기에서 역수(逆豎)란 원래 반역자를 비하하는 표현이요,
요비(妖婢))란 조정 근처에 얼쩡거리면서, 또는 조정에서 도리에 맞지 않는 말,
즉 난언(難言)을 일삼는 여성을 비판하는 말이다.
희대의 간신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아첨을 일삼는 폐행(嬖幸), 또는 영행(佞幸)인
같은 당 사람들과 얼치기 방송인들이 이에 질세라 제세상인 양 마구 날뛴다.
영행(佞幸)이란 집권자에게 아양을 떨어 요행으로 총애를 구한 자들인데,
서기 195년이니 무려 1900여 년 전 사마천(司馬遷)이 영행 열전에서 간신 축에도
못드는 낯간지러운 자들인 영행에 대하여 일침을 놓았으니 그는 이천 년 후의
한국 사회를 미리 예언한 거다.
그들 스스로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한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숱한 거짓말을 하는 양심과 욕심이 아픈
사람들을 보면 괜히 측은해진다.
이들에 대해 국민은 출기제승(出寄制勝)을 하지 않더라도 민심이 모이면
승리하리라.
11;57
끼륵대는 소리와 함께 북쪽 하늘로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사라진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박목월' 시인의
~기러기 울어 에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라는
가곡 '이별의 노래'가 떠오른다.
툭! 하고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올린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깊어진다.
스치는 가을바람 한 점이 내 삶을 스스로 사랑하라고 하며 산등성이로
사라진다.
12;02
망태를 손에 든 노인이 산기슭을 따라 오르며 밤과 도토리를 줍는다.
밤과 도토리를 줍기엔 요즘이 최적의 시기다.
밤이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 등 5대 영양소를 고루 갖춘
완전식품임을 조상들은 물론 저 노인도 알겠지.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필요 없다는 우리나라의 밤 생산량은 5만 4천여 톤으로
중국의 197만 톤, 터키의 6만 4천 톤에 이어 세계 3위라고 한다.
밤이라는 유실수를 택하여 공주 정안에 대규모 밤 단지를 만들 게 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慧眼)에 새삼 감탄을 한다.
푸드득하며 소나무에서 쉬고 있던 직박구리가 무엇인가를 물고 창공으로
날아간다.
직박구리는 꿀을 좋아하기에 벚꽃이 피면 벚나무에 붙어서 살다시피 하고
쇠솔딱새나 힌눈썹황금새는 층층나무 열매를 좋아하며,
버섯이 자라고 껍질이 벗겨진 나무는 많은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어
딱따구리가 좋아한다.
지렁이를 좋아하는 '호랑지빠귀'가 "흐이여"하는 소리를 남기고 사라지니
불곡산은 사람은 물론 새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을 가졌다.
불곡산은 중부지방 여느 산과 같이 참나무, 밤나무, 개암나무, 층층나무,
노린재나무, 황벽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보이며 소나무도 간간히 보인다.
저 봉우리가 정상이다.
거대한 바위덩어리는 괴물에 가까운데 오히려 고요한 풍경을 선물한다.
정상인 상봉에 오르려면 땀깨나 쏟아야겠다.
지금 산이라는 자연은 울긋불긋한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온갖 치장을 했고,
거친 암봉의 대슬랩 구간이 아찔한 풍경을 보여준다.
펭귄바위를 지나며 슬랩구간이라 안전로프를 잡는다.
정상 오르기 전 백 미터의 암벽지대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오르기가
부담스러우며 겨울철 눈이 내리면 매우 위험한 코스라 하겠다.
그동안 내가 올랐던 수락산(637m), 불암산(508m), 도봉산(726m),
사패산(52m), 북한산(836m), 호명산(425m)이 파노라마가 되어 펼쳐진다.
회상해보니 참 많이도 올랐구나.
지금 느림의 미학이 585회니 1,000회를 채울 수 있을 때까지 무릎이 성성하려나,
이 또한 욕심이라, 나옹선사의 말을 들어야겠지.
12;20
불곡산 정상(470.7m)에 올랐다.
소슬바람이 땀에 젖은 등판을 말려준다.
정상 아래는 수천 길 낭떠러지요,
발을 힘껏 구르면 몸이 저절로 바람을 타고 떠올라 저 사바의 세계를 하염없이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파주 감악산과 더불어 불곡산은 임꺽정의 전설이 깃든 산이다.
임꺽정(임거정 林巨정)은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하였는데,
1559년경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까지 세(勢)를 확장했고,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다가
1562년 1월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는 실존인물이다.
전세(田稅)와 군역(軍役), 환곡(還穀)에 시달린 백성들,
당시 지배층의 학정과 수탈에 고통을 겪던 백성들은 임꺽정을 의적(義賊)으로
칭송하였다.
지금의 터무니없는 부동산과 세금 정책,
현 법무장관이 아들의 탈영과 관련 불법 사후승인 청탁으로 군기가 엉망이
돼버린 나라,
전 법무장관이 딸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위조 및 온갖 잡술(雜術)로 세상을
어지럽힌 사건 등이 국민을 질리게 하였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새로운 의적(義賊)이 되어 이들을 처단할 수는 없는 건가,
요즘들어 엉뚱한 한 망상을 갖는 일이 부쩍 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임꺽정을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임꺽정이 개인의 욕심을 떠나 당시 양반사회의 모순에 맞서 관군과
싸움을 벌린 그의 행적에 대하여 도적질을 넘어 반란으로 부르는 거다.
가을의 소슬바람은 무언가 설레게 하고, 어디론가 자유롭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이 가을이 지나면 황소바람이 몸을 옹송그리게 만들겠지만, 지금 당장은
산들바람을 소리로 듣고 몸으로 만지는 순간이다.
12;42
얼마 후면 종심의 세계로 들어간다.
당구장에 자주 나가 친구들과 실력이 늘지 않는 당구를 치고, 담소를 나누는
술자리에서 앞으로 몇 년이나 건강하게 즐길 수 있을까에 대해 화제가 된다.
남보다 인생을 길게 산다는 것, 인간답게 천수를 누린다는 것은 어쩌면 상실의
과정을 길게 겪는 것일 수도 있다.
13;17
나이가 들수록 많은 이별을 하게 되고 새로운 행복거리를 만들기가 어렵다.
애써 노인지반(老人之反)을 외면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다.
따라서 남은 살가운 기억과 추억을 먹고 살 수밖에 없기에 나는 또 하나의
만추(晩秋)의 추억을 만드는 거다.
머리 위로 낙엽이 무한정 떨어지고, 사각사각 소리 나는 낙엽을 밟는다.
하산길에 '양주별산대놀이' 공연을 만났다.
국가무형문화재 2호인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산대놀이로
음악, 춤, 노래, 연극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약 250년 전부터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
공연한다는 별산대놀이를 방송국에서 열심히 촬영을 하고,
나 또한 촬영 금지라는 관계자의 말을 무시하고 숨죽여 촬영을 한다.
산대놀이에 대한 친구의 지적에 따라 재확인을 하니 양주별산대놀이가
아니고, 황해도 무형문화재 1호인 '만구구탁굿'으로 정정을 한다.
15;00
가을의 어느 날,
산행을 끝내고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 전철에 몸을 싣는다.
2020. 10. 2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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