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6. 05;30
'지칭개'가 세상을 버리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채비를 마쳤다.
자연에서 자라는 대개의 풀은 유위(有爲)나 무위(無爲)를 따지지 않고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진다.
이들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자연의 법칙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거다.
제비꽃, 봄맞이꽃, 개불알꽃들이 하고현상(夏枯現象)이라는 자연현상을 빌려
슬며시 사라진 자리에 바랭이, 쑥, 쇠비름이 왕성하게 영역을 넓혀나간다.
06;00
산에서 내려와 30년을 입었던 등산용 바지를 버렸다.
그리고 5년을 신었던 등산화도 버렸다.
30년 전 마비의 후유증과 통증을 이겨내려 산에 푹 빠졌을 때 거금을 주고 산
쿨맥스 계통 쉘러 팬츠와 고어텍스 기능으로 25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산 등산화,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 동안 내 몸에 가까이 있던 물건을 버리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옷과 신발에도 감정이 있다면 버리는 나에게 무엇이라 했을까.
하도 오랫동안 입었더니 닳고 닳은 바지와
80kg에 육박하는 내 몸을 실고 전국의 산을 누비며 고생한 등산화 바닥은
흰 부분이 나올 정도로 많이 닳았기에 버리지만 괜히 허전하고 미안한 느낌이
든다.
은행에서 현직으로 근무할 때,
서정쇄신에 이어 정화추진운동을 했고 이어 '클린 오피스' 개념이 도입되어
지점마다 불필요한 집기, 비품을 버리고 보존기한이 넘은 문서를 파쇄(破碎)
하기에 바빴지.
사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거는 당연한 거라,
클린 오피스 개념과 관계없지만 대부분 직원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작업을
했다.
진짜 클린 오피스 개념은 쓸모가 적은 집기와 비품, 문서를 버리고 사무실을
단순화 시켜 동선(動線)을 짧게 함으로서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건데
말이다.
06;30
먼저 핀 양귀비가 시든 꽃잎을 개여울로 흘러 보낸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웰다잉(well dying)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집착을
끊고 미련을 덜어내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황혼길을 걸어가며 먼 데 마음 두지 않고 가볍게 걸어가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양귀비 꽃잎처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라져야하는 게 아닌가.
07;30
산책을 끝내고 TV를 켜니 희대의 간신들이 화면에 나온다.
독버섯처럼 숱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져도 또 다른 사신(邪臣)이 나타나는 세상.
시골에서 농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잡초로 '바랭이'를 꼽는데,
좀비 같은 간신들은 바랭이보다 더 끈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국민들의
가슴에 염장을 지른다.
자리나 지키며 봉급이나 타먹고 주변 눈치나 살피는 구신(具臣),
군주에게 모든 것을 맞추고 알랑거리는 유신(諛臣),
속은 음흉하고 겉으로는 삼가 하는 척 하는 간신(奸臣),
동료를 이간질하고 중상모략에 능한 참신(讒臣),
사사로이 붕당을 만들어 자기 파벌을 키우는 적신(賊臣),
간사한 말재주로 군주의 눈을 가리는 망국지신(亡國之臣)들이 들끓는 나라가 된지
오래이다 보니 국민들은 간신이 누구누구인지 다 안다.
시간이 갈수록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간신들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늘어나니
이들에겐 끊임없이 윤회하는 제행무상이라는 자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세상살이가 현인(賢人)들의 말처럼 비우고 버린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낡은 등산복과 등산화를 버리듯 간신들을 버리는 방법은 없는 걸까.
양귀비와 엉겅퀴를 보면서 다스려진 마음을 간신들이 나타나 마구 헝클어버렸다.
2021. 6. 16.
석천 흥만 졸필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림의 미학 631 나이가 들면서 보이는 것 (0) | 2021.06.24 |
---|---|
느림의 미학 630 두 가지 착각 (0) | 2021.06.20 |
느림의 미학 628 아버님 전상서 (0) | 2021.06.12 |
느림의 미학 627 나(我) (0) | 2021.06.08 |
느림의 미학 626 별명의 등급 (0) | 2021.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