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1. 06;00
초록이 뚝뚝 떨어지는 숲속에서 노란색이 보인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 노랗게 핀 '미나리아재비'를 만났다.
'미나리아재비'라,
미나리아재비과는 전 세계에 1,900여 종이 분포하고, 우리나라에는 19속 130여 종이
살고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꽃이 지금 내가 찍고 있는 '미나리아재비'이다.
미나리아재비목에 속하는 많은 꽃 중 '모데미풀'은 한국 특산식물이며,
내가 그동안 만났던 복수초, 동의나물, 할미꽃, 종덩굴, 큰꽃의아리, 으아리,
꿩의다리, 노루귀, 투구꽃을 떠올린다.
꽃 이름 중에는
며느리와 관련된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각시와 관련된 각시붓꽃, 각시취, 각시투구꽃, 각시둥굴레,
노루와 관련된 노루귀, 노루삼, 노루오줌, 노루참나물,
닭과 관련된, 닭의장풀, 닭의 난초,
아기와 관련된 애기괭이눈, 애기똥풀, 애기물매화, 애기부들, 애기수영, 애기앉은부채,
쥐와 관련된 쥐꼬리망초, 쥐오줌풀, 쥐다래, 쥐방울덩굴,
중(스님)과 관련된 중대가리나무, 중의무릇이 있는데
이밖에도 사위질빵, 할미밀빵 등이 생각난다.
아재비, 아제비란 아저씨의 강원도 사투리로 미나리의 아저씨뻘 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며느리, 각시, 아기, 사위, 할미 등만 아니라 아저씨까지 사람과 관련된 꽃 이름이
많건만 유독 어머니와 아버지가 관련된 꽃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은퇴 후 힌두교에서 말하는 인생 네 단계 중 임서기(林棲期)와 방랑기(放浪期)가
혼재된 삶을 이어가며 10여년간 전국의 백대명산은 물론 수많은 산야(山野)를
누비고 다녔지만 지금까지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련된 꽃을 찾지 못해 유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 미나리아재비 >
2008년인가,
암으로 생을 마감하는 노부부와 재산을 탐하는 자식들이 겪는 갈등과 화해를
그려낸 4부작 드라마 '쑥부쟁이',
자식들에게 실망한 아버지가 쑥부쟁이꽃 앞에서 스르르 무너지던 장면이 눈앞에
선하게 오버랩(overlap)되는데 부모님과 관련된 꽃으로는 쑥부쟁이가 유일하게 기억이
나는 꽃이다.
미나리아재비를 바라보며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메는 금요일,
11시에 근무가 끝나니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
11;30
비가 자주 내려 봄 가뭄이 없어서인지 모심기가 끝난 논마다 물이 가득하고
산야는 점점 녹색으로 변해간다.
운전대를 잡고 달리다 보니 진천의 봉화산과 문안산, 만뢰산이 눈에 들어오고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추모공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11;50
유골함 앞에 놓여진 사진 한 장,
회갑잔치 때 찍은 부모님 사진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진 속엔 아버지 회갑 때 모습인데 나는 종심(從心)이 되어 더 늙은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아버지!
초등학교 시절 천주교 마당에서 공짜 영화를 보고 일어나다가 인파에 휩쓸려 운동화를
잃었지만,
이튿날 아무 말씀 없이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시고 신발가게에 가 운동화를 새로 사주신
아버지,
육군 입대 전 농사일이 싫어,
공직에서 은퇴 후 과수원에 기거하시던 아버지께서 사과나무 벌레 구멍에 약을 주입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백곡저수지에 낚시를 갔더니 저수지까지 찾아오시고 내가 잡은 붕어로
요리한 매운탕을 맛있게 드시던 아버지,
장마 폭우로 물이 뒤집힌 저수지에 위험을 무릅쓰고 배 요금을 두 배로 쳐주고 고립된
나를 구하러 오신 어머니,
내가 전방부대인 백두산부대에 배치되고 '인삼밭'이 지뢰밭이라는 전방은어를
큰형님에게 들으신 후 몇날며칠 식음을 전폐하셨다는 아버지,
학생 때나 군인 당시 '아버님 전상서'로 올린 편지를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셨던 아버지,
잠시 묵념 중 지난세월 부모님의 애틋했던 정을 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버지의 아들에서 아들의 아버지, 손주의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이젠 나도 꽤 많이 늙은 모양이다.
더 늦기 전에 산야에서 이름 없는 꽃을 만나면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는 꽃 이름을 지어
부모님 전상서에 같이 보내리라.
그리하면 내 그리움이 사랑한다는 마음과 함께 부모님 계시는 저세상에 전해지겠지.
2021. 6. 11.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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