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5.
며칠 전 일이다.
당구를 치던 중 친구가 고향친구들과 같이한 골프장에서 한 동창이 '썩은이'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수양이 덜 되었는지 짜증이 나
목소리가 커진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개의 별명을 가지게 마련인데 나는 별명이 많은 편에 속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몇몇 동무들이 '썩은이'라 불렀고,
고등학교 시절은 얼굴이 까무잡잡해서인지 '땅꾼'과 '닭도둑놈'으로 통했으며,
지점장 시절엔 직원들이 '산적두목'으로 별명을 지었다.
< 벌노랑이 >
50~60년대 사내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기계총'을 앓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 없이 '삼수이발관'에서 상고머리로 이발만 하면 기계총에 걸려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는 바람에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이발관에 들려 바리캉(bariquant) 소독을 부탁도 하셨지만,
여러 형제들, 동네친구들은 머리에 기계총이라는 부스럼을 달고 살았고,
특별한 치료약이 없어 아궁이에 싸리나무로 군불을 땔 때 끝부분에 나오는 진액을
머리에 발랐던 기억이 난다.
기계충이라 불리었던 기계총,
즉 '두부 백선'은 머리의 뿌리에 곰팡이균이 기생하는 질환으로 이발기구 등에 의해
전염성이 강했다.
기계총이라는 피부 사상균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어느 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계총도 싹 사라졌다.
어느 학자는 우리나라의 산(山)이 민둥산에서 벗어나 울창한 수풀이 조성되자,
산의 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부스럼이
사라졌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나는 많은 별명 중에 유독 '썩은이'이라는 별명이 듣기 싫었기에 그 별명을 잘 부르는
동창에게 화도 냈고, 점차 싫어져 만남을 기피하기도 하였으니 그만큼 나만의 콤플렉스
(complex)였던 셈이다.
< 금계국 >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게 사람의 호칭이다.
호칭엔 관명(이름)과 자(字), 호(號)가 있는데,
이름을 호적에 올리면 관명이 되고 올리지 않은 다른 이름은 아명(兒名)이며,
살아있으면 함(銜)자라 하고 죽으면 휘(諱)자라고 한다.
사람을 부를 때 서로가 어색하거나 불편할 때 관명 대신 자(字) 또는 호(號)를
불러주는데 호에는 존칭이 붙지만 자에는 존칭을 쓰지 않는다.
자(字)는 16세이상 성인이 되면 부모나 집안 어른이 지어주며,
호(號)는 국가에서 내리는 충무, 충정 등 시호(諡號)가 있고,
덕망이 특출하거나 학문, 예술이 뛰어나 남이 지어주는 송찬(頌讚)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기 스스로 직접 짓는다.
그러나 별명은 우연한 계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보통인데
그 사람의 특징, 성격, 환경, 외모 등을 특정해서 지을 때가 많다.
전통적인 전의법(轉義法)인 환유(換喩), 제유(提喩), 은유(隱喩)의 수법을 활용해
만들어진 별명은 서로 일치감을 수반해야 오래간다.
인간세상의 인과(因果) 법칙에선 '말도 씨가 된다'.
썩은이라는 별명으로 불린지 40년이 지나서 뇌종양으로 머리가 진짜 썩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나의 참담했던 심정을 그 누가 알까.
간신과 충신에게도 등급이 있듯이 별명에도 품격이 있고 등급이 있다.
국가와 민족에게 훌륭한 업적을 쌓을 수 있어 본인에게 무한한 영광을 주는 계기가
되는 별명이 상급(上級)이요,
성격이나 특성으로 지은 별명이 중급(中級)이라면,
신체의 불구라든지, 결점을 부각하여 지은 별명은 하급(下級)이라고 생각된다.
말소리에도 귀가 있고 마음에도 입이 있기에
별명은 서로가 관심과 사랑으로 지어주고 친근하게 불러주어야 오래간다.
특히 어렸을 때의 별명은 그 사람의 일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외모, 특성, 성격, 장래의 희망 등을 고려하여 예쁜 별명을 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동안 내가 지었던 지인들의 호와 별명을 떠올린다.
2021. 6. 5.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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