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636 어떤 망서지방(忘暑之方)

김흥만 2021. 7. 18. 10:05

2021.  7.  18.  05;00

동편하늘이 아침노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먹구름과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마구 뒤엉켜 드잡이 질을 하고, 그 사이로 습기를

가득 먹은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스친다.

 

아침노을이 붉었으니 오늘은 얼마나 많은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망월천 개여울에 흰빰검둥오리가 부화한지 얼마 안 되는 9마리 병아리를 이끌고

상류를 향해 헤엄을 치며 나를 잔뜩 경계한다.

 

숲으로 들어서자 어젯밤 내린 소나기로 습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이 마구 내뿜는 피톤치드로 머리가 맑아지고,

아직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도라지꽃을 확인하며 천천히 올라간다.

 

오늘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노인이 내려온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인사를 하는데 유독 이 노인네만 나타나면 나는

마스크를 손바닥으로 눌러 숨을 쉬지 않고 인상을 박박 쓰며 지나간다.

 

일 년 내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시끄러운 음악을 틀며 다녀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고, 어제는 숲속에서 담배까지 피워대다 나한테 걸려 욕을 한바탕 먹었으니

이젠 자중 좀 하려나.

                               <  미국 자리공  >

 

지난주 목요일 아차산 산행을 하며 더위를 먹었는지 한참을 혼났다.

금요일 오후엔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코로나에 걸렸나,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든다.

1차 백신도 맞았고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켜 열도 없고 목구멍이 아픈 거도 아니고

몸 컨디션이 양호하기에 나름대로 확인을 하니 코로나, 성대결절, 갑상선암은

아닌 듯싶다.

 

여름철에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쐰다거나 더위를 먹으면 성대가 건조해져 그런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며 물을 조금씩 자주 마셔 수분 공급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거다.

 

05;30

목소리가 변형된 지 3일차라 조금 좋아진 느낌이 들어 인적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

작은 소리로 노래를 해본다.

 

~도레미파솔라~까지는 탁한 소리라도 제대로 나오는데,

~♩시도~에선 목소리가 갈라지고 고음처리가 되지 않으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10;00

아침시간인데도 온도가 32도가 되니 후덥지근해진다.

목소리 변형으로 에어컨을 켜기도 신경 쓰이니 어떻게 더위를 피할까.

 

서재 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어 볼까.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바닥이 찬 방에서 이리저리 뒹굴뒹굴 구르는 것도 좋다.

차가운 쪽을 찾아 오른쪽으로 굴렀다가 왼쪽으로 구르다 소파 다리에 부딪혀

아픔으로 한참을 헤맨다.

 

새벽 일찍 산에도 다녀왔고, 책을 베개 삼아 왼쪽 오른쪽에 장르가 다른 책을

놓고 번갈아 보다가 눈이 피곤해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빨갛던 아침노을에도 불구하고 더위를 한방에 날려줄 소나기는 언제

내릴지 소식이 없다.

먹구름을 흰구름이 마구 몰아내 툭 트여진 하늘은 맑고도 드넓어지고 햇살은

점점 강해진다.

 

오늘은 어떻게 더위를 잊어야 할까.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니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어떤 망서지방(忘暑之方)을

택해야 더위를 피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한다.

 

누워서 이리저리 뒹굴다 서가(書架) 여기저기에 질서 없이 놓인 약봉지와 약병이

눈에 띈다.

 

나는 연말과 6월말엔 으레껏 휴대폰 연락처를 정리한다.

연락이 없는 누군가는 삭제하고 또 누군가는 새로 등재한다.

내 나름대로 삭제의 기준은 3년간 한 번도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칼로 무를 베듯이 누구나 다 적용되는 건 아니다.

설령 3년간 대화가 없었어도 마냥 그리운 사람은 떠남과 만남이 매우 중요하기에

남겨둔다.

 

휴대폰의 연락처는 이렇게 개인적인 주관으로 삭제하는 반면,

보존기한이 있는 약봉지나 약병의 기준은 명확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약병과

약봉지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버리는 게 금세 끝날줄 알았는데 작업이 의외로 더디다.

약병의 보존기한은 아주 작은 글씨로 인쇄되어있어 집중을 하지 않으면

확인이 어렵기 때문이다.

 

날짜가 경과한 약병과 약봉지를 열어 지퍼백에 담자 금세 꽤 많은 약이 모인다.

모아진 약을 매립용으로 버려도 되는지 확인을 하니 지하수나 강물이 항생제 등에 의해

오염된다며 가까운 약국에 가져다줘야 한다는 거다.

 

내친김에 1992년 5월에 받은 혈압계를 꺼내 작동을 해보니 에러가 많이 나온다.

30년을 쓰고도 정상작동을 바라는 내가 어리석은 게 아닌가.

 

이것저것 버릴 것을 챙기는 나를 보고

아내가 "금세 죽을 사람같이 정리를 한다"며 구시렁댄다.

 

종심의 나이에서 움켜쥐고만 있으면 추해진다.

물건도 버릴 것은 적당히 버리고, 생각도 적당히 버리고, 추억도 버려야 하는데

생각은 점점 많아지니 이 또한 노인지반(老人之反)인 모양이다.

 

13;00

약을 정리하며 더위를 잊은 채 서너 시간이 흘렀으니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망서지방(忘暑之方)이 아닌가. 

 

초인종이 울리며 아기들이 들어온다.

아기들과 뒹굴며 놀려면 목구멍이야 어떻게 되던 에어컨을 켜야 하겠지.

 

                                 2021.  7.  1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