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3. 05;00
오늘은 가을이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처서(處暑)이다.
다른 날은 몰라도 처서인 오늘만은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태풍 '오마이스'의 영향을 받아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주룩주룩 쏟아진다.
지금 내린 빗물로 새로 생긴 웅덩이에서 맹~꽁♬ 하는 맹꽁이 소리와 함께
개구리가 울어대야 제격인데 숲속은 적막에 빠졌다.
매미들 맴맴대는 소리 사라졌고 간간히 풀벌레 소리만 들리더니
숲과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머뭇대다가 적막을 깬다.
21도까지 떨어진 서늘한 기온이 내 몸을 감싼다.
여름이 슬그머니 물러나고 가을 기운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으려는 모양이다.
처서(處暑)라는 말은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다.
처서가 오면 여자들은 여름 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고 선비들은 책을
말렸다.
오늘같이 비가 내려 그늘에서 말리면 음건(陰乾)이다.
책이야 어차피(於此彼)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그늘에서 말려야 하지만
옷을 제대로 말리려면 햇볕에 말려야 하는데 이를 포쇄(曝曬)라 했다.
이 시간 태풍의 길목에서 모진 비바람을 맞고 있는 아랫녘의 주민들은
얼마나 힘들까.
농민, 어민, 축산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일 년 농사를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며 물난리를 겪고 있는 현장 동영상을 본다.
예전엔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 했고,
처서비가 내리면 '십 리에 천석이 감하고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고 했다.
전라도에서는 처서 날 비가 오면 대추 농사에 차질이 생겨 바로 시집가야 할
큰 애기들이 울고 간다며 처서비를 경계했다.
그만큼 처서의 날씨는 과일이 익고 벼 이삭이 패는 시기라 한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결정할 정도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10;30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려 복숭아 한 상자를 샀다.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며 고향의 과수원에 주렁주렁 열렸던 복숭아와
사과나무 사이를 다니시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비가 내릴 때면 온갖 시름으로 안절부절 못하실 때가 많았다.
복숭아 수확시기에 비가 내리면 당도가 떨어지고, 낙과(落果)가 많이
생기며 과일에 작은 생채기만 생겨도 금세 썩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과수농사는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벼농사와 조금 결이 달라,
이맘때 비가 많이 오면 과일의 수확량과 품질에 차질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 아버지!
처서비 소리에 취해 나도 모르는 새 잠시 침정(沈靜)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망각 속에 있던 아버지가 떠오르니 처서 날 내리는 빗소리는
그리움의 늪이었구나.
2021. 8. 23.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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