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5. 10;00
창밖에서 '아카시아'향이 솔솔 들어온다.
태풍 몰아치듯 벚꽃이 세상을 하얗게 수놓고 떠나가자마자
이팝나무 꽃이 세상을 하얗게 밝혔다.
이젠 이팝나무 꽃도 시들어가고 마치 교대라도 하듯이 아카시아꽃이
집 앞의 산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덩달아 신이 난 '직박구리'가 맑은 소리로 노래를 한다.
이놈들은 유난히 좋아하던 벚꽃 꿀이 사라지자 아카시아꽃으로
갈아탔나 보다.
아카시아 숲 속으로 사라지는 산까치 종류인 '어치'를 바라보며
동요 ~~♬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었네~~♪
'과수원길'을 흥얼거린다.
나 어릴 때 시골집에 과수원이 있었다.
만 여 평의 과수원에 사과나무 360주(株), 배 120주, 복숭아 100주,
거봉포도가 100그루나 되는 규모로 진천에선 제법 큰 과수원이었지.
우리 과수원 가는 길이 과수원길 동요의 가사와 딱 닮았다.
울타리로 아카시아 나무를 심었기에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는
꽃이 피고 지며 아카시아 향으로 중독이 될 지경이었다.
노래 가사 2절대로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이
돼버린 고향 과수원길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잠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카시아 꽃의 정확한 이름은 북아메리카
원산의 '아까시'가 맞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나무의 번식력이
왕성해 선산의 묘지 등에 침범한다는 편견으로 농촌에서 욕을 많이
먹었던 아까시나무가 현재는 우리나라 꿀 전체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밀원(蜜原) 식물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산림녹화를 위해 대량으로 심어진 아까시나무는
번식력이 왕성해 미움을 받았지만 햇볕과 물을 독점하는 소나무와
다르다.
콩과 식물이라 죽으면 반드시 쓰러지고 뿌리혹박테리아로 질소라는
영양분을 주변에 공급해줘 다른 식물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
식물이기도 하다.
동구 밖 과수원길의 아카시아꽃,
초등학교 시절 아카시아로 배웠고, 여름방학 숙제로 아카시아 씨앗을
두 되 정도 학교에 제출하기도 했던 아카시아.
막상 제 이름인 '아까시'로 부르면 가시 돋친 억센 식물로만 느껴져,
이제부터는 서정적이며 싱그럽고 향기 짙은 아카시아(Acacia)로
이름을 불러야겠다.
우리는 전쟁 중에 태어났기에 베이비 붐 바로 이전 세대이다.
농촌에선 보릿고개가 당연히 있었고,
초등학교 시절 많은 친구들에게 도시락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학교 운동장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강냉이죽이나 딱딱하게
굳은 우유덩어리를 배급받아 허기를 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쩌다 미군들이 지나가면 "기부 미 초콜릿!"을 외치며 쫓아다녔고,
주지 않고 가버리면 "조지 나 간빵"하며 주먹을 내밀어 욕을 하는
감자를 먹이고 골목길로 도망을 치기도 했었지.
가난하고 먹을 것 없던 시절,
간식은커녕 하루 세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허기진 아이들이 밥 대신 따먹은 아카시아꽃은 서러움의 꽃이기도 했다.
< 아버지의 과수원 길
육군 병장 계급장을 달고
박말 작은 고개를 넘어가던 날,
굵은 뿔테 안경을 쓰신 아버지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며 날 기다리셨지.
그날도 아카시아 꽃 향기가 과수원을 덮었고
아버지는 가득 채운 막걸리 잔을 드시더니
너도 많이 컸구나 하며 내손을 꼭 잡으셨다.
전 일본 서예대전에서 장원을 했던 명필 손가락,
평생 공직자로 지내 곱던 아버지 손바닥엔
과수원의 거친 일에 굳은살이 박였고,
한없이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을 나는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통학교 월반(越班)을 두 번씩이나 한 진천 신동으로
불리었던 아버지는 어느새 초로가 되어 살짝 등이
굽기 시작하고,
농사일이 싫은 내가 제대 후 서울로 도망을 쳤어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않으셨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말 안 듣던 아버지의 셋째 아들도 할아버지가 되었구나.
아카시아 향에 취해 과수원길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면 꿈속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
이번엔 '미스김 라일락' 향기가 창문으로 쳐들어온다.
거실을 거쳐 서재까지 들이친 고혹(蠱惑)적인 향기로 머리가 어찔해지니
바야흐로 봄이 절정에 이른 모양이다.
2022. 5. 15.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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