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6. 08;00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의 위세에
눌려 안경을 선글라스로 바꾼다.
어라~ 이 녀석이!
새로 핀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담장에서 나를 유혹한다.
붉은 루주를 바른 어느 여인의 입술처럼 요염한 장미꽃을
바라보며 묘한 생각이 든다.
지난 5~6월 담장을 붉게 물들였던 장미가 세월을 착각했는지
울타리 여기저기에 다시 피기 시작하는 거다.
알바를 다닌 지 벌써 2년 하고도 9개월째인가.
집에서 전철 풍산역까지는 608m요, 사무실까지 1,100m
정도를 걸어서 출근한다.
출근시간은 9시이다.
그러나 슬슬 걸어가도 8시 13분경 도착하기에 급할 게 없으니
주변을 살피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4거리엔 깃발을 든 어르신 4명이 학생들과 주민들이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수고를 하고,
모르는 사람이지만 시간이 같아 매일 보는 익숙한 얼굴과 함께
목적지를 향한다.
작은 개를 산책 시키는 동네 아주머니의 여유로운 표정,
올망졸망 책가방을 멘 아이들과 어머니들의 유쾌한 대화,
장난꾸러기 중학생들이 재잘거리는 거리의 풍경은 평화롭다.
어느 여인은 잰걸음으로 바삐 걸어가고,
수천수만 송이의 꽃을 거느린 배롱나무에 매달린 참매미가
마구 울어댄다.
작은 개여울에 물이 흐르고, 쇠백로 두 마리와 왜가리 한 마리가
조용히 물속을 응시한다.
물가에는 두 손을 합장한 듯 분홍색 '부처꽃'이 활짝 피었고,
'방동사니'와 '큰 고랭이'가 무성하게 자란다.
< 방동사니 >
방동사니는 돗자리를 짜는 왕골(莞草)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지만 성질은 다르다.
방동사니는 키가 작고 껍질을 벗기기가 어려운데 반해
왕골은 한국이 원산지로 2m 정도까지 키가 자라며 줄기의
단면은 3각형으로 되어있어 돗자리를 짜기 위해 껍질을
벗기기가 쉽다.
인기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촬영지였던 외가
사랑방에서 옥골선풍(玉骨仙風)의 풍채를 자랑하던
외할아버지께서 돗자리를 짜던 옛 풍경을 떠올리며 타박타박
길을 걷는다.
습도가 85%로 매우 높아 등판이 젖기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 내내 나를 괴롭히는 다한증(多汗症)을 언제나
극복할 수 있을까.
일상(日常)이 돼버린 길거리의 아침,
낯설지 않고 익숙한 길을 걸으며 문득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08;13
잠깐 침묵을 지키던 매미들이 일제히 울어대고, 사무실 입구에
도착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은 또 얼마나 더우려나.
노랗게 물든 벚나무 이파리 한 장이 발밑으로 떨어진다.
일엽지추(一葉之秋)라,
여기저기에서 나뭇잎이 단풍 되어 떨어지기 시작하면
지긋지긋한 이 여름도 미련없이 떠나가겠지.
염천(炎天)을 만들려 이글거리는 태양을 애써 곁눈질하며
아침의 사색(思索)에서 깨어난다.
2023. 9. 6.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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