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9. 04;30
부엉이가 앞산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소쩍새도 간간히 울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부엉이 소리에 잠이 퍼뜩 달아나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밤중이 한참 지나 여명(黎明)이 가까워지는 시간,
새벽하늘엔 실낱같은 그믐달이 간신히 보이고 그 옆엔
주먹만 한 개밥바라기별이 빛난다.
부엉이가 잠이 들어 고요해진 숲 속,
한구석 '사위질빵' 덩굴 사이로 토종 '박주가리 꽃'이 보인다.
이 아이가 들판에서 자라야 하는데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된
외래종 '가시박'이라는 놈한테 밀려나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 박주가리 >
어두운 숲 속은 바람소리 들리지 않고 고요하다.
그 속을 걸으며 잠시 침잠(沈潛)에 빠져든다.
시인들은 바람이 불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숲 속을 평화롭다고
말한다.
평화롭다고?
숲 속이라는 자연은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터인데
그들은 자연의 겉모습만 본 모양이다.
아마도 숲 속의 식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어느 전쟁보다
시끄러울 텐데 말이다.
나는 요즘 들어 사람관계나 숲의 사물을 거꾸로 보기도 한다.
당구를 칠 때도 옆에서 친구들이 훈수를 들면 일부러 반대로
친다.
비록 하수지만 머릿속에서 나만의 공이 가는 길을 설계하고
그림을 그리면 종종 적중한다.
숲에서 사물을 볼 때도 일부러 멀리 떨어져 관조(觀照)를 하면
나무와 풀, 꽃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가죽나무'를 만난다.
< 가죽나무 >
옥죄는 칡넝쿨에 숨이 막히는지 '가죽나무'가 몸부림을 친다.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없는 곳이면 대개(大槪) 환삼덩굴과
칡덩굴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데 이곳에선 칡넝쿨이 완승을
거두고 환삼덩굴을 밀어냈다.
이내 전투에서 승리한 칡덩굴이 한구석에서 자라는 가죽나무를
덮치기 시작했다.
옆을 지날 때마다 칡을 치워줬는데 칡은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죽나무를 칭칭 감는다.
갈등(葛藤)이라는 말의 원조답게 칡은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가죽나무를 칭칭 감아 내 손가락의 힘만으로는 잘라내기가
어렵다.
물론 칼이나 가위 등 도구를 쓰면 가죽나무를 쉽게 도와줄 수가
있다.
그러나 요즘 사회 분위기로는 흉기를 휴대하고 다니다 걸리면
개망신을 당할 수가 있어 그냥 손으로만 제치고 몇 가닥
잘라준다.
< 담쟁이 >
담쟁이가 소나무를 칭칭 감아 오르며 수액(樹液)을 빨아먹는다.
기생관목인 '겨우살이'처럼 담쟁이도 염치가 없는 건가.
담쟁이는 키가 작아 큰 나무들의 그림자 아래에서는 빛이 부족
하여 살아가기가 힘들다.
따라서 담쟁이가 온전하게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빛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데 자기보다 높은 키를 가진 대상을 만나면
어떻게든 기어올라서 햇빛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높이는
것이다.
자연의 생육성쇠멸(生育盛衰滅) 과정에서 성(盛)과 쇠(衰)의
간절기(間節氣)에 해당하는 요즘,
나무나 풀, 넝쿨 등은 각자의 생존본능에 충실하고,
먹이사슬의 계급에 따라 가을의 쇠(衰)와 겨울의 멸(滅)을
대비한다.
키가 큰 나무들은 햇볕을 독점하느라 여념이 없고,
작은 식물들은 그 틈새에서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받고자
죽을힘을 다하는 거다.
어쩌면 상위 포식자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동물보다 마음대로
이동하지 못하는 식물의 생존전쟁이 더 처절한지도 모르겠다.
이 가죽나무는 칡이나 환삼넝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큰다.
얼마나 더 클 수 있으려나,
산수유나무로 유명한 구례 산동마을 개울가에서 2012년 3월
20일 만났던 '참죽나무'가 문득 생각난다.
물론 가죽나무와는 성질은 조금 다르지만 사촌 격이다.
그곳에서 키가 30여 m 이상 되는 참죽나무를 만났었는데,
동네의 신목(神木)이라면 지금도 잘 있겠지.
'층층나무'도 덩굴성 식물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근처에 물과 태양빛에 욕심 많은 소나무와 칡덩굴이 있더라면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였을 텐데,
다행히 활엽수 교목 사이에서 태어났고, 주변에 덩굴을 말하는
아관목도 없으니 층층나무는 적절한 장소에서 성장만 하면
되는 거다.
< 층층나무 >
참고로
교목은 보통 6m 이상 높이 자라는 단풍나무, 은행나무 등
큰 키나무를 말하며 뚜렷하게 큰 하나의 줄기가 있는 나무이다.
이에 반해 관목은 떨기나무 즉 3~6m 정도의 작은 키나무로
가지가 촘촘히 많이 난 개나리, 산초, 진달래, 철쭉 등을
꼽으며 인동덩굴 등은 '아관목'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06;00
환삼덩굴이 생태교란종인 '단풍잎돼지풀'을 밀어낸 사이로
여명이 밝아오고 검단산 위로 붉은 구름띠가 생기기 시작한다.
운동하는 아낙네들이 수다 떨며 올라오는 소리에 산기슭의
고요가 깨지고 나는 슬그머니 카메라 전원 스위치를 끈다.
2023. 9. 9.
석천 흥만 졸필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림의 미학 769 가을은 온몸으로 소리를 낸다. (0) | 2023.09.24 |
---|---|
느림의 미학 768 새 친구 '꾸지'를 만나다. (0) | 2023.09.15 |
느림의 미학 766 사색(思索)의 거리 (0) | 2023.09.06 |
느림의 미학 765 환삼의 변신 (0) | 2023.09.02 |
느림의 미학 764 호루라기 부는 날 (0) | 2023.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