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12. 08;00
영하 3도까지 떨어진 기온을 타고 부는 고추바람은 방한
복장의 틈새를 노려 몸 안으로 매섭게 파고든다.
아직 11월 중순인데 가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주의 만물을 만든 신(神)인 조화옹(造化翁)에게 달려가
실종신고를 하여야 하나.
통통하게 살이 찐 너구리 한 마리가 종일 볕이 들어 아직도
파란 단풍나무잎이 그대로인 담벼락 뒤로 숨는다.
이곳엔 누가 살았을까.
담벼락은 무엇을 보호했을까.
양택(陽宅)이었을까, 음택(陰宅)이었을까.
앞을 지날 때마다 늘 궁금한 생각이 든다.
예전 산길이 뚜렷하지 않았고, 가로등이 설치되기 전 랜턴을
켜고 이곳을 지날 때는 한여름밤에도 한기(寒氣)를 느꼈었다.
영혼인 지박령(地縛靈)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죽은 장소를
맴도는 듯 몸이 오싹해져 소름이 끼치기도 했는데,
제대로 된 산길이 생기고, 가로등이 세워지자 음산한 기운은
사라지고 너구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공원숲길로 변하기 전 근처에 무덤이 5기가 있었고, 누군가
살았던 집터의 흔적도 있었다.
09;00
너무 일찍 찾아온 추위에 꺼내서 한 번도 입지 못한
가을옷을 주섬주섬 챙겨 옷장 안으로 수납을 하고, 겨울용
티셔츠와 패딩(padding)을 꺼낸다.
얼마 전 한참 동안 입지 않았던 옷을 버렸으니 더 버릴만한
옷은 없다.
이젠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갖추고 사는 생활을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를 실행할 때가 되었다.
10;00
옷장을 정리 후 서가(書架)에 눈이 간다.
수십 년 동안 이 책 저 책 등 읽은 책을 버리지 않고 서가에
꼽은 책이 이천여권이나 되었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이 좋지 않아 독서를 못한 지 3년이 넘었다.
이젠 최소한의 책만 남겨두고 정리해야겠다.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두 권 빼내다가 얼마 전 작고한 친구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친구는 낚시는 물론 음악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수년 전 레코드판과 CD를 정리한다고 연락이 왔고,
나한테도 CD 여러 장을 보냈으며, 그 후 3천여 권의 책을 인근
군부대에 보낼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운명을 예감했는지 얼마 후 '루게릭' 병 진단을 받았고,
일 년여 투병생활 끝에 끝내 별세를 했는데 책을 보낼 때
마음은 어떠했을까.
10;30
삼국지를 손주 녀석들에게 주려고 10권짜리 전집을 꺼내니
서가가 휑하다.
예전부터 언젠가 물려주려고 생각은 했지만,
나도 독서를 즐겼기에 삼국지 같은 애장품은 아직 주지 못했다.
삼국지를 읽으면 인생과 사람이 보인다 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여러 번 읽었다.
정비석 작가가 쓴 삼국지, 이문열 작가가 쓴 삼국지를 5번 이상
완독을 했고,
지금 손주들에게 주려는 장정일의 삼국지는 눈이 고장 나는
바람에 6권부터 읽지를 못했다.
읽지 못하는 책이라도 막상 서가에서 빼니 그 자리가 휑하고
허전하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도 없앴다.
전화기에 등록되었던 연락처도 많이 지웠다.
옷도 꽤 많이 버렸다.
오늘 서가에 꼽힌 책을 정리하면 많이 비우게 된다.
이젠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으련다.
복잡했던 머릿속도 비우고 삶의 중요한 부분에 집중을
해야겠다.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면 진정한 미니멀리스트
(minimalist)가 되지 않을까.
2023. 11. 12.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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