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805 오여사! 그대는 가까이 하긴 너무 먼 당신

김흥만 2024. 5. 6. 14:42

2024.  5.  6.  14;00

오늘도 종일 비가 내린다.

어제 내린 40mm도 부족해 20mm 이상 더 내리는 중이다.

 

이번 비는 시인이 윤물무성(潤物無聲)으로 사랑하던

봄비가 아니고 포악한 장맛비로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서재에서 당구채널을 보다가 거실에 나와 서성댄다.

서성대는 것도 바로 싫증이 나 침대에 누워 빈둥대다가

냉장고를 뒤진다.

 

휴! 다행이다.

아직도 마른오징어 세 마리가 비닐봉지에 담긴 채로

남아있다.

 

옆에도 오래된 마른오징어 한 마리가 또 보인다.

아마도 세 마리 짜린 작년 아들내외가 강원도 여행을 다녀

오며 열 마리짜리 반축을 사 왔고 그중에서 세 마리가

남은 모양이다.

 

예전에는 20마리짜리 한축을 사왔는데 요즘엔 한축

가격이 15만 원 정도라 누구라도 부담스럽겠지.

 

옆에 한 마리는 언제부터 냉장고 구석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오징어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게 많은 나는 마른오징어에게

'오여사'라고 부르며 장난을 친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는 어머니가 김밥 도시락과 마른

오징어 한 마리, 삶은 달걀 한 개, 사과 한 개를 간식으로

챙겨 주셨던 추억도 지금 떠오른다.

                             <    당점섬과 예봉산   >

 

어른이 되어서도 냉장고에는 늘 마른오징어가 있었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날궂이로 한 마리를 구워서 씹는

즐거움이 있었다.

 

집에서 음주(飮酒)를 즐기지 않아도 오징어를 자주 씹었고,

아들과 야구장에 가서는 응원을 하며 두 마리를 씹어도

거뜬할 정도로 치아가 건강하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대폿집이나 호프집에 들리게 되면 제일 먼저 주문하는

안주는 구운 오징어였고,

동해안 오징어보다는 울릉도 오징어를 더 좋아했으며,

배 오징어보다는 바닷가에서 해풍으로 건조한 오징어를

더 좋아했지.

 

그러나 오징어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금징어'라는 별명이

붙고 나서는 노랫말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사유로

마리당 2~3천 원 하던 오징어가 작은 것도 7~8천 원은 

예사고,

하나로마트에서 생물 오징어 한 마리에 1만 5천 원이

붙은 가격표를 보고 오징어 사랑을 접어버린 거다.

 

일박산행을 가서도 일행들의 눈치를 봐가며 장바구니에

슬쩍 한 마리를 집어넣는 것도 최근엔 자제를 한다.

 

한 마리만 산다면 4~5천 원 비싸진 거다.

막걸리값은 3천 원에서 5천 원으로 올랐어도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고, 또 다른데 쓰는 돈은 따지지 않더니 유독

오징어를 살 때면 왜 이리 인색하고 민감해질까.

비싸면 비싼 대로 그냥 사면되는 건데 참 묘한 심리다.

 

물론 노가리와 멸치로 대체하여도 된다.

그러나 예전에 오징어를 편안하게 사서 먹던 때만 생각하며

배신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사 먹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냉장고에서 꺼낸 이 놈을 바로 구울까,

아니면 냉장고에서 오래되었으니 끓는 물에 데칠까 궁리를

하다 도로 냉장고 한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16;00

때마침 2박 3일로 부산여행을 떠났던 손주 녀석들이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신호가 떴다.

 

친구 사랑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전교 1위)을 탄

큰 손주에게 무슨 말로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해줄까.

 

오징어를 씹는 게 문제가 아니고 칭찬해 줄 말을 고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활짝 연다.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잠시 소강상태다.

아이들이 들어오자 잔뜩 가라앉았던 집안의 공기가 요란

하게 요동을 친다.

 

                            2024.  5.  6.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