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806 자아의 고독

김흥만 2024. 5. 11. 10:45

2024.  5.  11.  05;00

여명(黎明)이 사라진 하늘에선 구름끼리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는데 벌써부터 먹구름과 흰구름이

맞붙어 싸우니 오늘 내릴 비는 제법 사납겠다.

 

숲으로 들어오자 풀냄새, 나무냄새가 가슴 깊숙하게 

들어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직박구리가 신나게 나를 반기고,

먹이를 많이 먹었는지 덩치가 엄청나게 커진 까치가

산길에서 뒤뚱거리다 숲 속으로 뛰어간다.

 

바람결에 달려온 향긋한 꽃내음이 내 코를 호사시킨다.

산 위를 바라보니 진 줄만 알았던 아까시 꽃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향기를 보내는 거다.

 

휴! 다행이다.

저 아까시 꽃마져 지었다면 그윽한 향이 사라졌을 거고,

나는 아무 생각없이 산길을 오르고 내렸을 텐데 말이다.

 

은행나무, 참나무 등 큰 키 나무 위 높은 가지에 돋던

연둣빛 새순이 어느새 진한 초록으로 색깔을 갈아치웠고,

쥐똥나무가 벼이삭같이 생긴 흰꽃을 주렁주렁 달기

시작한다.

 

큰 키 나무가 주던 배려의 시간은 지났다.

작은 키 나무와 작은 풀들이 햇빛을 충분히 받고 잎사귀들이

무성(茂盛)해질 때를 기다려주던 큰 키나무들의 잎사귀들도

더불어 왕성(旺盛)해지며 숲은 점점 부자가 된다.

                                        <   수레국화   >

 

덩달아 갈색으로 황량했던 숲 속은 작은 풀들로 파랗게

변했고 때가 되자 먼 유럽 쪽 지중해에서 이민 온

'수레국화'가 산길 개골창에서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산길 가로등 불빛아래 윤슬이 되어 반짝거렸던 '개별꽃'은

아주 짧은 춘몽(春夢)을 꾸고 어디론가 일제히 사라졌다.

 

가로등이 5시 13분에 일제히 꺼지자 재잘거리던 개개비,

꿩, 직박구리도 잠시 침묵모드로 돌아섰다.

금년에도 물까치, 쇠제비가 돌아오려나 먼 하늘가를

바라보다 다시 숲길을 걷는다.

 

05;30

어둠속에 잠기려 했던 숲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숲 속에 하얀 찔레꽃이 여기저기에 피어 어두웠던 숲 속을

밝힌다.

 

벚꽃, 아까시, 진달래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자연의 시계를 벗어나지 못했 건만 찔레꽃은 한동안

숲 속의 인이 되어 이곳을 지키겠지.

 

산 전체를 지배하던 춘삼월의 꽃이 지고 이젠 여름꽃이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5월이다.

 

늘 어둠 속에서 꽃잎이 4장짜리인 '으아리'를 보다가

밝은 새벽 꽃잎 5장짜리 희아리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으며

괜히 신바람이 난다.

 

마치 행운을 상징한다는 네 잎 클로버(clover)를 찾은 듯

말이다.

                         <    희아리   >

 

'으아리'를 찍으며

어릴 때 배운 동요 중 끝말 이어가기 노래가 생각난다.

 

♬ 리리~ 리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대싸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 ♬~~였던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야생화 중 이름 끝자에 '리'자가

붙은 아름다운 들이 많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으아리 외에도

개나리, 꽃마리, 히어리, 꿩의다리, 금꿩의 다리, 낙지다리,

너도개미자리, 원추리, 참나리, 말나리, 털중나리, 중나리,

 

솔나리, 박주가리, 범꼬리, 에델바이스의 한국판 이름인

솜다리, 전동싸리, 하늘타리, 가막사리, 도꼬마리, 맨드라미,

금마타리, 애기나리 등 수십 종류가 되는데,

 

유감스럽게 솔나리와 꽃이 쇠물푸레와 비슷한 '하늘타리

(天瓜)'는 찍지 못했다.

 

예전 2009년 9월 15일 영동 민주지산(1,241m)를 오른 후

하산길 1,100고지에서 '쇠물푸레꽃'을 찍고 나서

'하늘타리'인가 고민을 많이 했었다.

 

산행 후 쇠물푸레와 꽃이 거의 흡사한 하늘타리는 박과로

잎사귀가 오이와 비슷하다는 걸 확인하고 쇠물푸레와 잠시

혼동했었지만 확실히 알게 된 거다.

 

05;40

이곳 산길에서 자주 마주쳐 얼굴이 익숙해진 아주머니를

만나 반가운 아침인사를 나눈다.

 

망월천 개여울에 핀 노란 창포꽃 세 송이가 쓰러져 물살에

흔들리고 양귀비도 빨간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한다.

 

저 창포꽃도 꽃다운 청춘인가 싶더니 쓰러져 짧은 일생을

마칠 준비를 한다.

 

어느새,

짧게 머물다 갈 봄이 떠나려 한다.

청춘과 봄은 남가일몽(南柯一夢)이다.

쓰러진 꽃과 우리네 삶을 괜스레 연관시키는 내가 바보가

아닌가.

 

발소리를 내며 혼자 타박타박 걷는다.

때때로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고독,

삶의 여정은 어차피 혼자이다.

 

나의 그리움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까.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조바심 낸다고 기다림이 짧아지지는 않는다.

설사 짧아지지 않는다 해도 나는 내 그리움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또 기다릴 것이다.

 

                         2024.  5.  1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