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5.
5월의 하늘은 푸르고 맑다.
산은 초록이고, 산속의 맑은 공기까지도 초록빛이다.
오후부터 우박과 거친 비가 내린다는데 저렇게 맑고
고운 하늘이 정말로 성질 고약한 조화옹(造化翁)으로
변해 휴일의 달콤함을 깰 수 있을까.
황산숲길에서 새벽산책을 마치고 컴퓨터로 주요 사항을
스캔(scan)해 보니 오늘이 석가탄일이자 스승의 날이다.
5월은 기념일이 다른 달에 비해 유독 많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비롯해,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5월 10일 유권자의 날,
5월 11일 동학 농민혁명기념일, 입양일,
5월 14일 식품안전의 날, 그리고 오늘 5월 15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자 스승의 날이다.
그리고 5월 18일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요,
5월 19일은 발명의 날, 5월 20일은 성년의 날,
5월 21일은 부부의 날, 5월 25일은 차(茶)의 날이며,
5월 31일은 바다의 날이다.
여기에다 내가 귀빠진 날인 5월 11일까지 합치면 무려
16일이나 된다.
매년 반복해 찾아오는 날이지만 스승의 날이 되면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이었던 정동환 선생님이 생각난다.
서울로 유학을 온 이후 선생님을 뵙지 못했고
군에 입대하기 전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뜻밖에도 당시 걸리면 치료가 힘들다는 폐병으로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했었지.
매일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나, 네 명에게 과외
공부를 시켜주셨고,
정해지지 않은 수업료를 만들어 드렸다가 우리 네 명은
혼꾸멍나고 급기야는 마당에서 두 팔을 들고 벌을 섰다.
선생님의 외동딸인 '정사또'는 우리를 놀려댔고,
수업료를 받을 수 없다는 선생님의 진심을 그날 알았다.
보릿고개가 호랑이보다 무서웠던 시절,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미국에서 원조해 준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학생이 태반(太半) 넘었고,
딱딱하게 굳은 버터조각을 배급받을 정도로
어느 집이나 누구나 할 거 없이 다 살림이 어려웠다.
전깃불이 들어오는 집은 소수였고,
유리 등피(燈皮)인 '호야'를 끼운 남포(lamp)를 사용하는
집과, 남포를 살 수 없어 사기로 된 등잔불을 켜고 사는 집이
더 많은 세상이었다.
전기도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특선과, 밤 12시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면 전기가 나가는 일반선을 사용하는 집이
구분되었던 시절,
선생님은 너희들이 세상에서 제일 존귀하다며 당시 충북의
명문으로 꼽혔던 진천중학교에 잘 들어가기를 바랄 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 어려서 몰랐던 말,
3학년때부터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조선일보를 읽었기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한자는 알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성장하고 먼 훗날 성인이 되어서야
"선생님 당신보다 제자인 너희들이 더 존귀하고,
천지간에 있는 모든 만물이 존귀하다며 그런 것을 받아
들이려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좋지만 우선 사람다운
사람으로 커야 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은 그날 우리에게 벌을 세우며 인성교육(人性敎育)을
하신 거다.
또 한분은 인제 제12 보병사단장과 국군 정보사령관을
지내신 김영철 장군이다.
양구 제21 보병사단 66 연대 군수과에서 복무할 때 참모로
계셨던 김 사령관께서는 나한테 암기력과 계산능력이
특출(特出)하다는 칭찬과 함께 자아(自我)를 길러 주었다.
장교도 아닌 병사인 내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며
유격훈련도 못 가게 할 정도였던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전역 후에도 오랜 기간 인연이 지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친구와 이웃들, 나의 지인들 모두가 나에게 스승이다.
어느 부동산 여사장이 스승의 날인데 마땅히 선물할
사람이 없어서 보냈다는 스타박스 커피 상품권을 받기도
했던 스승의 날,
어느덧 봄의 끝자락이다.
이제 여름이 올 거고, 가을이 가려하면 겨울이 오고,
아무리 모진 겨울이라 해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봄이
온다.
극(極)에 달하면 반전이 오는 건 세상의 이치이다.
극즉필반(極卽必反)이랄까,
아니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까.
어느새 5월 5일 입하가 지났고,
며칠 후면 5월 20일 소만이다.
세월은 쉴 새 없이 흐르고 흘러 망종, 하지, 소서, 대서가
지나면 입추, 처서, 백로가 오겠지.
서재문을 닫자 사위(四圍)에 적막이 쌓인다.
잠시 눈을 열어 머릿속을 비우고, 눈을 감고 나의 나만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비로소 나 스스로 존귀하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평온해진다.
2024. 5. 15.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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