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7. 11;00
나이가 먹으면 눈썹도 하얘지는가 보다.
때가 되니 눈썹도 하얗고 염색한 머리카락도 검정
색깔이 빠지며 지저분해졌다.
머리털이 적은 사람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커트를 한 지 3주일이 채 되지 않았는데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자랐다.
며칠간 거울을 볼 때마다 너무 빨리 자란다고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오늘에서야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원장의 휴대폰 스피커에서 미용실 위치를 확인하는
애교 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조금 후에 젊은 아주머니가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와
미용비를 선계산하며 할머니에게 자상하고 살갑게
행동을 한다.
딸은 아니고 손녀나 손주 며느리로 보이는데
요즘 세상에 저렇게도 어른을 챙기는 여인이 있다니,
모처럼만에 보는 흐뭇한 장면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 흰 뺨 검둥오리 >
이런 장면은 동네 미용실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는 단골을 좋아한다.
지금 다니는 미용실은 주택은행 영등포역 지점장
시절부터 출입을 했으니 25년이 넘은 셈이다.
영등포역 근처 지하 이발관에 들렸더니 신발 벗고
바지를 갈아입으라 해서 분위기가 묘했는데 알고
보니 당시 유행하던 퇴폐 이발관이었다.
그런 이발관 출입이 싫어서 여성들이 많아 조금
어색해도 미용실 출입을 하기 시작했고, 미용실
사정으로 단 한 번만 다른 곳에서 커트를 했다.
당시 30세였던 미용실 원장이 어느덧 50대 중반이
지났고,
나 또한 40대에 미용실 출입을 시작해 종심에
이르렀으니 미용실과 함께 세월이 익은 모양이다.
옆자리에는 다른 할머니가 파마를 하고, 단골
손님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들락거린다.
간혹 젊은 사람들이 예약을 하고 오기도 하는데,
분위기는 영락없는 동네 사랑방이다.
친구나 지인들에게서 미용실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가끔 받기도 하는데 나는
한마디로 거절한다.
단골이 왜 좋은가,
우선 신경을 쓸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그냥 자리에 앉으면 내 스타일에 익숙해 알아서
커트와 염색을 해주니 다른 요구나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식당도 정이 들면 웬만해선 다른 데로 옮기지를
않는다.
철산지점장 시절 방송인 '고 백남봉 형님' 등과 함께
'서울복집'만 고집하고 다녔더니 나중에 다른 복집
사장이 찾아와 애교성 항의를 하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당구장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90% 이상
식사를 하는데 자리에 앉으면 자동으로 상차림이
나온다.
주문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되니 굳이 뇌(腦) 속에 있는 해마(Hippocampus)를
쓸 필요가 없어 좋다.
그렇다고 수십 년째 변화나 발전도 없이 고인 물처럼
사는 건 아니다.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가고, 계절은 때가
되면 반복되어 바뀌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세상은
돌아간다.
물론 삶이란 때에 따라 변화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결같은 단골이 있고 세월이 흘러도 그 관계가
유지된다면 삶에 대한 영향력이 바뀌지 않아도 변화나
발전 그 이상의 가치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실제보다 십 년은 더 젊어
보이는 사람이 거울에 보인다.
저 사람이 바로 나인가,
미용실 원장의 손은 마법을 가진 손인가 보다.
2024. 7. 17.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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